이번 칼럼이 필자가 쓰는 마흔 번째 칼럼이면서 올해의 마지막 칼럼이다. 숫자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사실 사람은 사소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여 만족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 실망에 치우쳐 잘 할 수 있는 것을 망치기도 한다.
필자는 몇 가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사용하고 있는데 뜻하지 않게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좋다고 호응을 해주면 우쭐해진다. 반대로 나름의 의도를 갖고 잘 포장해서 올린 글이나 사진에 별 반응이 없거나 부정적인 반응을 받으면 기분이 상한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을 해봤다. 사람들은 타인의 반응에 얼마나 영향 받을까? 많은 경우 타인의 반응에 따라 생각과 감정이 좌우되긴 하지만 별로 영향을 안 받는 사람도 있다. 주변에 신경을 많이 써서 지치는 사람들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 마냥 부러울 것이다. 올해 마지막 주말을 맞이하였는데 올 한 해 얼마나 주변에 민감하여 일희일비하였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남 생각을 하는 것과 남 눈치를 보는 것은 의미가 다르며 지금까지 언급한 타인을 의식하는 부분은 주로 남 눈치를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두 가지가 정말 다른 부분일까? 심리학자 클로닝거는 인간의 기질 여러 영역 중에서 타인의 반응에 대한 예민도 영역을 사회적 민감성, 보상 의존(Reward dependence)이라는 명칭으로 언급했는데 이 기준에서는 남 눈치를 보는 경우와 남 생각을 많이 하는 경우 모두에서 사회적 민감성 지수가 높다. 클로닝거의 기질 분류를 역으로 생각하면 남 눈치를 보는 경우와 남 생각을 많이 하는 경우가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잘하면 남 눈치 보는 에너지를 남을 생각하는 에너지로 치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발상을 갖게 한다. 어떻게 보면 두 에너지는 같은 근원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그 에너지를 발휘하는 개인의 자아상의 차이에 따라 남 생각과 남 눈치의 비중이 달라질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 4:19∼20) 클로닝거가 기질에 대해서 설명할 때 중요한 것은 어떤 기질 특성도 좋다 나쁘다로 판단하지 않고 각각의 기질 특성마다 다 장단점이 같이 있다고 중립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희일비하는 것도 생각해보면 그 의미를 좋다 나쁘다고 섣불리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둘 다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좀 더 차분하고 깊이 생각하고 느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실이나 현상을 너무 쉽게 선악으로 구분하려는 태도를 조심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지만, 현실은 우리에게 그것이 참 잘 섞여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이러한 현실에서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이 지혜이다. 마태복음 13장에는 씨의 비유가 세가지 나온다. 지금 언급한 내용과 가장 관련 있는 비유는 곡식과 가라지 비유(24∼30절)일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씨를 통해 비유했을까? 아마도 예수님은 ‘과정’을 고려해보라는 의미였을 것 같다. 곡식과 가라지를 확실히 나누는 것은 최종적으로 그리고 천국에서 가능한 일인데 사람들은 자꾸 그것을 중간 과정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하려고 한다. 판단과 지혜는 손잡고 다녀야 한다.
최의헌<연세로뎀정신과의원>
[최의헌의 성서 청진기] 일희 일비
입력 2015-12-25 1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