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은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맞는 성탄절이다. 엄마 바르노(가명·30)씨는 두 달 전 태어난 이 아기를 ‘무비나’라고 부른다. 어디서나 사랑과 환영을 받으라는 뜻이라고 했다. 아직 아기에겐 정식 이름도 국적도 없다.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서 그렇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바르노씨는 지금 불법체류자가 돼 있다. 아기 출생신고를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불법체류 중임을 밝히고 출국 절차를 밟는 것이다. 그는 “내가 불법이라 아기도 불법이에요. 같이 나가야 돼요”라고 했다.
처음부터 불법체류자였던 건 아니다. 바르노씨는 국제결혼 업체의 소개로 한국 남성과 결혼해 2008년 입국했다. 한국에 가면 ‘한국 드라마’처럼 풍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혼생활은 석 달을 넘기지 못했다. 남편은 아내가 살찌는 게 싫다며 밥을 굶겼다. 냉장고에는 양파밖에 없었다. 라면 하나를 주고 세 끼를 먹으라고 했다. 1주일 동안 굶은 적도 있다고 한다. 초혼이라던 그는 알고 보니 재혼이었다.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었다.
3개월 체류기간이 지났지만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갈 수는 더욱 없었다. 고향 사람들에게 “결혼에 실패해 돌아왔다”는 손가락질을 받는 게 두려웠다. 전북 군산, 강원도 속초 등 전국을 떠돌며 식당일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비자가 3개월만 체류할 수 있는 관광비자였다고 기억한다. 친구가 소개해준 업체여서 행정서류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고 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삶이 힘겨워 지난해 같은 우즈베키스탄 출신 남자를 만났다. 결혼할 형편은 안 됐는데, 아이가 생겼다. 합법체류자였던 그 남자는 돌연 폭행 사건에 휘말려 강제출국당하게 됐다. 출산 예정일을 불과 닷새 앞두고서였다.
도저히 혼자 기를 자신이 없었다. 유산을 하려고 약도 먹어봤지만 쉽지 않았다. 다문화센터의 도움을 받았다. 병원에서 출산하면 곧바로 입양을 보내기로 했다. 그는 “아이 얼굴은 절대 보지 않을 테니 그렇게 해 달라”고 센터 관계자에게 여러 번 당부했다. 그런데 출산하던 날 아이 얼굴을 봐버렸다.
그의 출산을 돕던 간호사는 평소 하듯이 건강하게 태어난 핏덩이를 들어 산모인 그에게 보여줬다. 이틀간 진통이 이어질 땐 한 방울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아이 눈동자를 보는 순간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동안 겪은 고통과 절망, 외로움 따위는 까마득히 날아갔다. “아기 얼굴을 봤는데 어떻게 보내요. 저도 엄마잖아요.”
바르노씨는 지난달 아기 무비나를 데리고 복지단체 지구촌사랑나눔이 운영하는 ‘이주여성지원센터’에 왔다. 이 센터에는 무비나와 같은 처지의 아기 10명이 있다. 엄마들 국적은 탄자니아 세네갈 베트남 몽골 등 다양하지만 아기들은 국적이 없다.
바르노씨는 언젠가 아이와 함께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당장은 갈 수 없다. 지금 가면 아이도, 자신도, 고향의 가족도 모두 힘들 수밖에 없다고 했다.
무비나와 함께 맞는 첫 성탄절. 바르노씨에게 사랑과 구원은 멀게만 느껴진다. 선물을 사줄 돈도 없고, 아기를 두고 밖에 나가 일을 할 수도 없다. 무비나처럼 ‘사각지대’에 놓인 이주아동의 기본권을 보장해주려는 법안이 지난해 발의됐지만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센터를 운영하는 한재숙 이사는 “이 땅에서 태어난 소중한 생명들이 ‘투명인간’처럼 지낼 수밖에 없다. 사랑과 구원이라는 성탄의 의미를 우리가 되새기고 실천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글·사진=김판 기자 pan@kmib.co.kr
[기획] 성탄의 빛은 어디서 찾아올까요?… 국적 없는 이 아기의 크리스마스
입력 2015-12-25 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