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내면세계에 틀어박혀 세상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자폐증은 본능에 충실하면서도 때묻지 않은 작품을 그리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2011년부터 자폐성 장애를 앓는 작가를 발굴·지도한 시스플래닛 오윤선(37) 대표는 “자폐 증세는 예술가가 자신만의 화풍을 펼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며 “자폐는 예술과 맞닿아 있다”고 말한다. 아티스트 매니지먼트인 시스플래닛은 자폐 작가 5명을 포함한 소속작가 7명을 두고 있다.
지난 22일 서울 강남구 논현로 아틀리에에서 오 대표를 만났다. 가녀린 외모를 지닌 그는 조용하고 다소 느릿한 말투로 신중하게 질문에 답했다.
“저 역시 자폐성 기질이 좀 있는 거 같아요. 하고 싶은 것에 푹 빠지거나, 여러 사람과 소통하는 걸 종종 어려워하거든요. 그래서 자폐아동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오 대표는 2011년 가을 강남구 광평로 남서울은혜교회에서 자폐아동을 처음 만났다. 친구 소개로 온 밀알학생부 예배에서 그는 색다른 경험을 한다. 자폐아동들은 설교 시간에도 아랑곳 않고 예배공간에서 체조를 하거나 방방 뛰었다. 무질서한 모습에 눈살을 찌푸릴 수 있지만 오 대표는 그러지 않았다. 그의 눈엔 자폐아동들의 모습이 해맑고 예술적으로 보였다.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지만 자폐아동들은 남들 앞에서 자유롭게 감정을 표현하잖아요. 이들의 순수한 면이 참 좋았어요. 조금이라도 친해지고 싶어 그날 예배 후 담당 사역자에게 부탁했습니다. 미술에 관심 있는 친구가 있으면 우리 아틀리에에 보내달라고요.”
오 대표의 요청에 담당 사역자는 ‘평소 기도하던 제목’이라며 반색했다. 미술에 특별한 재능을 보이는 자폐아동의 꿈을 펼칠 방법을 놓고 평소 고민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해 11월 오 대표는 시스플래닛의 메인 작가인 신동민(21)군을 만났다. 어머니와 함께 온 신군은 자신이 평소 학교에서 그린 그림이 담긴 포트폴리오를 오 대표에게 내밀었다.
그림을 본 오 대표는 크게 놀랐다. 신군은 고등학교 2학년에 불과했지만 이미 자신만의 화풍을 가지고 있었다. 신군의 그림 중에는 고갱의 작품을 자신만의 화풍으로 소화한 것도 있었다.
“작품에 작가의 순수함과 때묻지 않은 풋풋함이 그대로 묻어났어요. 동민이뿐 아니라 자폐를 앓는 다른 작가들 작품도 마찬가지예요. 미대 등 정규 과정을 거친 이들의 작품에선 찾기 힘든 솔직하고도 독창적인 면이 있습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힘도 갖고 있고요.”
신군 등 자폐아동의 놀라운 재능을 알아본 그는 이듬해 1월부터 전시회를 기획하고 함께 작품을 준비했다. 전시회 이름은 ‘열린행성프로젝트’. 자신만의 세계에 사는 자폐아동이 그림으로 자신의 행성을 열고 세상과 교감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2012년 첫 전시회를 연 프로젝트는 올해로 4회를 맞았고, 1회부터 참가한 신군은 어느새 개인전을 여는 어엿한 작가가 됐다. 지난 7월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신군의 개인전 소개글을 쓴 한젬마 호서대 교수는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독창성은 노력한다고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그림에 소질 있는 자폐아동을 예술가로 육성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시스플래닛을 찾는 자폐아동은 점점 늘었다. 2013년부터는 밀알복지재단의 후원을 받아 재단이 보내는 자폐아동의 미술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프로젝트 초창기엔 의구심에 가득찬 눈으로 자녀를 보내던 부모들도 점차 마음을 열었다.
오 대표는 지난달 열린 프로젝트 전시회 도록 ‘대표의 말’ 말미에 ‘이사야 60(Isaiah 60)’을 넣었다. 회심케 한 성경구절을 암호처럼 넣어 이 일을 시작하게 된 초심을 잃지 말자는 의도에서다.
“자폐아동을 처음 만나기 얼마 전 이사야서 60장에 있는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말씀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이 일 이후 자폐아동을 만나 관심이 생겼고, 이후 4년간 이들을 작가로 키우는 일을 계속하고 있지요. 규모가 커지면서 학원처럼 아이들을 많이 받아 돈 벌라는 제안을 꽤 많이 받아요. 하지만 우리 목적은 자폐아동을 온전히 예술가로 키우는 겁니다. 그래서 월요일 예배모임 때마다 동료·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혹여 내가 초심을 잃으면 꼭 말해 달라’고요.”
오 대표는 시스플래닛을 사회적기업으로 일구기 위해 준비 중이다. 또 다양한 기업과 협업해 소속 작가 작품을 상품화하는 일에도 주력할 계획이다. 그는 “다음세대에선 자폐아동이 편견 없는 세상에 살 수 있도록 차근차근 사회적 발판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장애 딛고 일어나 빛 발하게… 자폐 화가와 아름다운 동행 ‘시스플래닛’ 오윤선 대표
입력 2015-12-25 1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