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유장춘] 삶의 자리로 들어오신 예수

입력 2015-12-24 17:25

크리스마스 스토리가 설정하고 있는 정황은 오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낭만적인 것은 아니다. 베들레헴, 마구간, 말구유, 그리고 애굽과 나사렛으로 구성되는 이 이야기의 핵심 사상은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구세주다.

작고, 누추하고, 초라하고, 멀고, 외진…. 우리 시대에 그곳은 물대포로 쓰러진 농민의 병상이요 갇힌 해고노동자의 옥방이며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젊은이의 골방이고 세월호와 함께 깊은 슬픔과 분노에 잠겨버린 가족들이 농성하는 천막과 같은 곳은 아닐까?

크리스마스는 우리의 삶의 자리로 들어오신 예수를 맞이하는 날이다. 언젠가부터 우리 교회에는 까마득한 옛날에 오셨다가 잠시 머무르고 가신 예수와 막연한 끝 날에 다시 오실 예수는 있어도 현재 여기 나의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예수는 계시지 않는 것 같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성경은 말하지만 사람들은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다. 기독교가 사람들 사이에서 입에 담기조차 거북한 이름으로 불리고, 예수를 믿어도 교회에 나가지 않는 가나안 성도가 백만을 넘어섰다는 소식도 들린다.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 무대는 황폐하고 썰렁하다. 지나친 말일지 모르겠지만 예수가 실제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교회, 예수가 경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신앙 현실,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없는 종교로서 이 시대의 기독교는 공허하기만 하다. 마치 예수의 등장이 임박했던 구약과 신약 사이의 그 텅 빈 공간과 같이. 마태가 전한 소식에는 예수의 역사적 등장을 이렇게 묘사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개역) 여기서 세계는 세계(世界)가 아니라 계보(系譜)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계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의 세상이 보인다. 이 계보의 끝은 이렇게 끝난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역사 안으로 등장하시기 위한 구약 전체의 길고 긴 여정의 간결한 요약이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영광스러운 계보에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이름들이 나온다. 시아버지에게서 아기를 낳은 며느리, 기생, 이방인이며 미망인, 그리고 남편을 죽인 남자의 아내. 한결같이 한스럽고 숨기고 싶은 이름들이다. 그러나 그들도 명예로운 지위를 차지하고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그 존재를 인정받았다. 그래서 예수의 세상은 은혜의 세계다. 누구든지 들어오기만 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절대적 은혜가 경험되는 자리다. 교회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 다윗으로부터 바벨론 포로까지는 왕들의 이름이 계속된다. 절대적인 은혜의 세계에 들어오면 새로운 신분이 부여된다. 하나님의 자녀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고 왕이신 그리스도의 친구다.

그러나 그 여정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바빌로니아에서 페르시아 헬라 로마에 이르는 제국들이 흥망성쇠를 반복하는 긴 세월동안 그들은 종살이를 면치 못한다. 이 비극적인 섬김의 길이야말로 사랑으로 선택하는 영성의 클라이맥스다. 우리는 그것을 십자가의 길이라 말하기도 하고 제자도라 이르기도 한다.

이제 예수가 등장할 준비는 끝났다. “예수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 절대은혜를 경험하고, 왕 같은 자아정체성과 자유를 소유한 후 스스로 사랑의 종이 되어 섬김의 길을 간다면 신화적 예수, 종말적 예수가 아닌 역사적 예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우리 시대에 등장하신 예수를 체험적으로 만날 수 있을까?

유장춘(한동대 교수·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