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부희령] 고요한 밤 어두운 밤

입력 2015-12-24 17:24

서울에서 출발할 때부터 눈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그날 나는 경기도 북쪽 끝자락까지 차를 몰고 가야 했다. 집이 그곳에 있었으니까. 날씨가 나쁘지 않고 길이 막히지 않으면 넉넉히 두 시간쯤 걸리는 거리였다. 크리스마스이브였고, 서울에는 잘 곳도 마땅치 않았다. 나는 반드시 돌아가야 했다.

수도권 외곽을 벗어나면서부터 도로에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차들이 줄지어 늘어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와이퍼가 바쁘게 유리창을 닦아내고 있음에도 커다란 눈송이들이 시야를 가렸다. 이상하게도 별로 두렵지 않았다. 유리창에 눈이 쌓이자 차 안이 아늑했다. 앞차의 붉은 후미등은 크리스마스트리의 알전구처럼 깜박였다.

마침내 우리 집이 있는 동네 어귀에 이르렀다. 가장 험난한 코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경사가 급한 S자 곡선의 내리막길을 지나야 했다. 비로소 겁이 났다. 핸들을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심호흡을 하고, 절대로 브레이크를 밟으면 안 된다는 다짐을 하면서 천천히 길을 따라 내려갔다. 그런데 차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살짝 밟자, 차가 반 바퀴쯤 스르륵 돌았다. 핸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차는 마치 살아 있는 동물처럼 제멋대로 가드레일 쪽으로 굴러갔다. 사이드브레이크를 잡아당기고, 나는 아직 채 멈추지도 않은 차에서 황급히 내렸다. 차는 혼자서 조금 더 미끄러지다가 멈춰 섰다.

차를 그대로 길에 버려두고 걷기 시작했다. 집까지는 4㎞ 남짓 남아 있었다. 눈이 막 그쳤고,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하얀 길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어두운 푸른빛. 영원히 끝나지 않고 이어져 있을 것 같은 길. 덜덜 떨리는 몸으로 걸으면서 나는 ‘물 위를 걷는 법’처럼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발이 빠지기 전에 다른 한 발을 내딛고 그 발이 빠지기 전에 또 다른 한 발을 내딛으면서. 길은 환하고 어둡고 멀고 고요했다. 그리고 내가 정말 살아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아름다웠다.

부희령(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