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히스토리] ‘大憂’에서 ‘大羽’로… 증권맨 사관학교 돌고돌아 새 주인품에

입력 2015-12-25 04:06



“대우(大宇)라는 이름은 그대로 쓰는 건가요?”

1999년 8월 서울 여의도의 증권거래소 기자실을 찾은 김창희 대우증권 사장은 기자들의 질문에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증권업계 부동의 1위, 한국 경제의 민간 싱크탱크, 증권맨들의 사관학교…. 여의도를 주름잡았던 대우증권의 운명이 갈림길에 있었다. 2년 전 한국을 덮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사태, 이른바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대우그룹이 해체됐다. 대우증권도 9개 은행의 손에 넘겨졌다. 84년 사장에 취임한 이후 16년 동안 대우증권의 황금기를 일궜던 김 사장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거야 물주(物主) 마음이지만, 그래도 증권업계에선 대우라는 브랜드가 아직은 유효하지 않겠습니까. 당분간이라도 대우증권이란 이름을 그대로 쓰자고 건의를 하겠습니다.”

◇외환위기부터 미래에셋 인수까지=당시 증시는 외환 위기를 빠른 시일내에 극복한 한국경제에 힘입어 새로운 호황기에 들어서고 있었다. 코스닥시장이 새로 문을 열면서 벤처기업이라고 이름만 달면 수십억을 투자 받던 때였다. 대신증권이 인터넷 주식거래로 각광을 받았고, 지점 없이 인터넷 거래만 전문으로 하는 키움증권도 등장했다. 한국 증시의 거래량이 세계최고 수준으로 올라갔다. 한 증권맨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박현주 펀드’로 돌풍을 일으키던 시점이었다.

그러나 대우증권은 이런 변화를 한발짝 떨어져 지켜봐야 했다. 지구를 상징했던 대우그룹 마크도 떼어버렸다. 은행들의 관리를 받는 처지라서 전산 시스템에도 제때 투자하지 못했다. 공격적으로 영업을 할 수도 없었다. 최대주주였던 제일은행조차 뉴브릿지캐피털이라는 일개투자사를 거쳐 영국계 스탠다드차타드은행에 팔려갔다.

대우경제연구소가 문을 닫았고, 업계 최고수준이었던 리서치센터의 인력들도 다른 증권사로 빠져나갔다. 이 때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며 대우증권을 지킨 인물 중 한 명이 현재의 홍성국 사장이다. 리서치센터 재건의 책임을 맡은 그는 정보통신(IT) 기업의 성장, 글로벌 저금리 시대 도래 등을 예언하며 대우증권의 실력이 아직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2009년 이명박 정부는 산업은행을 금융지주회사로 재편하면서 대우증권을 계열사로 끌어들였다. 대우증권은 최고경영진이 자주 바뀌면서 조직이 흔들렸다. 경영진이 정권의 눈치를 보면서 장기적인 비전이 사라졌다. 전국의 지점장들이 집단사표를 내는 일도 있었다. 업계 순위도 5위권 밖으로 떨어졌다. 대우맨들의 자부심도 땅에 떨어졌다. 공기업 같은 문화가 팽배해졌다. 2013년 정통 대우맨인 홍 사장이 취임하면서 그나마 조직이 새로운 각오를 다질 수 있었다.

그런 대우증권이 성탄절을 하루 앞둔 24일 새로운 주인을 맞았다. 외환위기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제자리를 찾은 셈이다. ‘대우’ 브랜드는 지금까지도 살아있다.

◇창업부터 1등까지=대우증권은 1970년 9월 23일 동양증권으로 시작했다. 당시의 주식 고수로 알려진 윤병강 일성신약 사장이 다른 6인과 함께 창립했다.

당시 한국 증시에 상장된 회사는 고작 48곳, 총자본금은 1342억9200만원이었다. 이미 대한증권 등 26개 증권사들이 연간 1억주의 거래를 두고 영업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여기에다 69년에 터진 증권금융주식 파동으로 시장이 어지려웠다. 331원이었던 증권금융주식이 공매도 공매수로 2000원까지 폭등해다가 다시 760원으로 폭락한 사건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72년 8월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증시 안정조치를 발동하고 자본시장육성법을 대폭 개정하면서 전화위복이 됐다. 자금력 있는 인수자를 찾던 윤병강 회장과 금융업 진출을 모색하던 대우실업 김우중 사장의 만남으로 73년 대우그룹에 속하게 되었다.

70년대 경제성장과 함께 동양증권도 커갔다. 기업공모 시장을 주도하면서 증권사의 역할이 단순한 주식투자 영업과 중계에 머물지 않고 기업과 투자자의 자금 순환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80년대에 들어와 업계 1위의 삼보증권을 흡수통합, 부동의 1위로 올라섰다. 김우중 회장의 경기고·연세대 동기였던 김창희 사장이 취임하면서 대우증권으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전성기가 시작됐다. 한국 증권사 최초로 일본에 해외사무소를 개설했고, 최초의 민간경제연구소인 대우연구소가 설립되면서 함께 외국인 자금을 국내에 유치하는 코리아펀드를 미국에 설립했다. 이렇게 시작된 해외 네트워크는 이번에 미래에셋증권이 대우증권을 인수하는데 중요한 포인트가 되기도 했다.

한국경제는 3저현상(저유가·저금리·저환율)에 힘입어 계속 성장했다. 기업의 주가도 오르면서 증시에 뛰어드는 개인투자자들이 급증했다. 88년 한국 증시의 거래대금은 58조원을 넘었고, 시가총액도 64조원에 이르렀다. 주식 투자 인구는 703만명이었다. 개미군단이라는 말이 등장한 게 이때였다. 대우증권도 2, 3위가 넘보지 못할 1위 자리를 굳혔다.

◇한국 증권맨의 자존심=많은 대우맨들은 김 사장을 대우증권의 전성기를 만든 인물로 기억한다. 자신의 질문에 직원들이 대답을 제대로 못하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꾸짖어 ‘김핏대’라는 별명이 있었다. 김우중 회장의 전적인 신뢰를 받아 여의도 이전, 과천 전산센터 건립 등 미래를 위한 투자를 과감하게 단행했다. 인재 양성에도 힘을 썼다. 공부를 위해 휴직을 신청한 직원에게 “월급 줄테니 파견 나가는 형식으로 갔다가 오라”고 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외환위기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 98년 10월 29일 일본 노무라 증권 서울지점에서 A4용지 4쪽 분량의 간단한 보고서를 발간했다. ‘대우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제목이었다. 이 보고서는 대마불사의 벽을 깨지 못하고 있던 채권단이 대우그룹 해체에 착수하는 계기가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보고서를 쓴 인물도 대우 출신이었다.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은행들이 대우증권의 지분을 인수했다.

이번 산업은행의 대우증권 매각 입찰에 참여한 금융사들은 실제 주가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써냈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산업은행이 대우증권 인수에 1조3000억원을 썼는데, 이번 매각이 성공하면 배당금까지 합쳐 1조원이 넘게 남는 장사를 하게 된다”며 “대우증권이 외환위기 이후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국 국민에게 수익을 안겨줬으니 한국 증권맨의 자존심을 지켜준 셈”이라고 평가했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