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격랑 헤치고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연 진시황… 그를 통해 ‘역사를 보는 눈’ 일깨운다

입력 2015-12-24 20:56
진시황은 13세에 왕좌에 올라 39세에 천하를 통일했으며 49세에 숨을 거뒀다.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던 진나라는 진시황 사후 3년도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사진은 중국 시안의 진시황릉 병마용.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일대기를 다룬 책인데, 구성이나 관점이 독특하다. 이 책에서 진시황은 주제라기보다 소재처럼 사용된다. ‘사기’에 기록된 진시황 이야기를 풀어서 들려주면서 ‘우리가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라는 어려운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이 책은 타이완대학교의 젊은 사학과 교수인 뤼스하오가 인문학 비전공자를 위해 만든 교양수업의 강의록이다. 그가 강의하는 ‘진시황 수업’은 타이완대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강의로 평가돼 왔다. 강의는 중국어 인문학 수업으로는 처음으로 2014년 세계 최대의 온라인 대학 강의 사이트인 코세라에도 개설됐다.

책은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1장)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중국의 역사 전체를 세 차례의 격랑기로 분류한다. 중국 고대사가 1차 격랑기에 해당하며 중국 고대문명의 정수를 ‘예(禮)’라는 한 글자로 정리해낸다. 사대부라는 계층과 그들로 대변되는 약 2000여년의 유교문화를 2차 격랑기, 아편전쟁 이후 현재까지를 3차 격랑기로 본다. 이어서 그는 진시황을 2차 격랑기 속에서 출구를 찾으려 치열하게 싸운 대표적인 인물로 정의하고, 그의 이야기를 통해 변화에 대처하고 새로운 시대를 탄생시킬 비결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출구를 찾는 것이야말로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본격적인 진시황 이야기는 “진시황제라고 불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진시황’과 ‘진시황제’를 구별 없이 사용하지만 둘의 차이는 크다. ‘황’의 의미는 ‘제’보다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기’를 쓴 태사공은 왜 ‘시황제’가 아니라 ‘시황’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한마디로 말해서 태사공은 편명은 물론 글 전체를 통해 진시황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다음 질문은 “진시황의 성은 무엇인가?”이다. “역사 공부 좀 해봤다면 진시황의 이름이 ‘영정’이니 당연히 영씨가 아니냐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기’에서는 분명 조 씨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진시황의 성을 ‘영’이 아니라 ‘조’라고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저자는 ‘성(姓)’과 ‘씨(氏)’, ‘명(名)’과 ‘자(字)’를 구분하면서 호칭법의 변천을 통해 중국 역사를 설명한다. 성은 핏줄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보여주는 자료이며, 동성(同姓)끼리 출신을 구분하기 위해서 다양한 씨족이 생겨났다. 저자는 “진한시대 이후,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이 사실상 대부분 ‘씨’에 대체되면서 성은 점점 갈 곳을 잃고 말았고, ‘자’와 ‘호(號)’는 아편전쟁 이후 예의나 법도를 따지지 않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사라지게 됐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나가는 서술 방식이 인상적인데, 책의 첫 문장에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제대로 질문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저자는 “역사는 살아가는 데 확실히 도움이 되지만 역사를 배우는 우리의 방식이 잘못됐다”면서 외우는 공부가 아니라 질문하는 공부를 제시한다. 진시황은 열세 살에 왕좌에 올랐는데, 그 과정은 과연 순탄했을까? 즉위한 지 9년 만에야 관례를 치르고 권력을 휘두르게 됐다. 이렇게 늦어진 것은 누군가 국정운영권을 넘기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 아닐까? 천하를 통일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 진시황은 왜 불로장생의 영약이라는 어린아이도 믿지 않을 이야기에 속아 넘어갔을까? 진시황에 대한 낯선 이야기와 함께 역사를 공부하는 재미와 매력, 유용성 등을 유쾌하게 보여준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