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중부 비사야 제도의 작은 섬, 지비팅길에 지난 18일 비가 내렸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물통을 들고 나왔다. 지붕 아래 물이 떨어지는 곳에 물통을 놓고는 입을 벌려 빗물을 받아 마시기도 했다.
물통에 물이 찰수록 어른들 얼굴은 어두워졌다. 대다수 집이 무너졌던 2년 전 태풍 하이옌을 기억하는 이들은 걱정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봤다. 기상예보를 들으려 라디오를 켰다. 빗줄기가 거세지자 어부들은 고기잡이배를 마을 중턱으로 올렸다.
지비팅길에는 물이 없다. 배를 타고 20분을 나가 세부섬에서 생활용수와 식수를 사온다. 파도가 거칠어 배를 띄우지 못하면 물을 구할 방법이 없다. 하늘은 애증의 존재다. 비를 내려 물을 주지만 태풍을 보내 모든 것을 앗아가기도 한다. 이런 곳에 빗물식수시설을 설치해주는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와 함께 지난 18∼20일 이 섬을 찾았다.
물 사러 가는 길
조멜(10)은 20ℓ 기름통을 양손에 들고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컨테이너’라 불리는 통 안에는 물이 담겨 있었다. 기름이나 양념을 담아 파는 통을 물통으로 쓰는 것이다. 집집마다 이 컨테이너를 20여개씩 갖고 있다. 배를 타고 나가 10페소(약 250원)에 물이 담긴 컨테이너 한 통을 사온다. 보통 한 가정에서 1주일에 20통(400ℓ)을 쓴다. 한국인 1명이 하루에 쓰는 양과 비슷하다.
마을에서 우물을 파보려 했지만 모두 짠물이 올라왔다고 한다. 식수는 물론이고 생활용수도 비가 오지 않으면 구할 수가 없다. 여유가 있는 집은 식수를 따로 사지만 대부분은 컨테이너 물을 식수로 쓴다. 형편이 어려운 집은 바닷물을 생활용수로 쓰기까지 한다. 수업을 마친 아이들은 물통을 나르고 5페소를 벌려고 바닷가에 진을 친다.
등굣길 아이들 손에는 죄다 물통이 들려 있다. 아침마다 1ℓ 정도 마실 물을 집에서 챙겨온다. ‘물 도시락’을 챙겨오지 못하면 학교 앞 매점에서 1페소를 주고 ‘아이스 워터’를 사서 마셨다. 손바닥만한 투명 비닐봉지에 식수를 담아 묶은 게 ‘아이스 워터’다. 아이들은 봉지 끝 부분을 깨물어 구멍을 내고 빨아 마신다. 이 돈이 없는 아이는 학교에 있는 수도꼭지로 간다. 수도꼭지를 타고 정부와 비정부기구(NGO)에서 설치해준 빗물탱크의 물이 흘러나온다. 그런데 물탱크 안의 물은 초록빛이고 비닐봉지 같은 쓰레기도 떠다녔다. 교사들은 이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하지만 목마른 아이들을 막을 수는 없다.
빗물을 ‘마실 물’로
재해구호협회는 20일 이 섬마을의 학교에 빗물식수시설을 설치했다. 지붕에 모이는 비를 60t 물탱크 3개에 저장하는 시설이다. 햇볕을 완전히 차단하기에 저장한 빗물을 식수로 쓸 수 있다. 재해구호협회는 올 7월에도 이 섬의 한 마을에 같은 규모의 빗물탱크를 설치했다.
학교는 지비팅길의 유일한 교육시설이다. 초·중·고교생 600여명이 다니고 있다. 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어 태풍 대피장소로 쓰이기도 한다. 태풍으로 물난리가 나면 마실 물이 더 문제가 된다. 이제 섬사람들은 태풍 때문에 물을 사러가지 못해도 식수 걱정을 덜게 됐다.
물탱크 설치를 끝내고 지붕에 물을 부어 잘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건물 벽에 붙은 수도꼭지에서 물이 흘러나오자 신기하게 쳐다보던 아이들은 ‘뚜빅’이라고 외쳤다. ‘물’을 뜻하는 이 지역 말이다. 엘리자베스(53·여) 교장은 “아이들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게 됐다. 이보다 좋은 크리스마스 선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재해구호협회는 물이 없는 또 다른 섬에서 3차 사업 사전조사를 하고 있다.지비팅길(필리핀)=글·사진 김판 기자
pan@kmib.co.kr
[르포-물 없는 필리핀 지비팅길 마을의 하루] 목마른 섬, 물탱크 설치되자 환호성
입력 2015-12-23 04:00 수정 2015-12-24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