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잔치’로 연명해온 한국경제호 곳곳에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전·월세보증금이 20% 떨어지면 89만 가구 집주인은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해 추가로 빚을 내야 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구조조정이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서 국내 기업 10곳 중 1곳은 한계상황에 봉착했다. 미국 금리 인상 이후 신흥국 위기가 본격화하면 한국도 안정권이 아니라는 분석도 나왔다. 한국은행은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하는 ‘금융안정보고서’(2015년 하반기)를 22일 발표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부동산 화약고, 자영업자 대출 위험수위=금융안정보고서는 주택 관련 부채 중 전·월세보증금의 심각성에 주목했다. 한은이 전·월세보증금이 20% 급락하는 경우를 분석해 보니 집주인의 11.9%는 추가로 대출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새로 들어오는 전세입주자에게서 보증금을 받아도 돌려줄 돈이 부족한 탓이다. 보증금 있는 임대가구는 746만 가구(전세 353만 가구, 보증부월세 393만 가구)로 11.9%는 88만7700가구에 달한다. 특히 집주인의 5.1%는 대출을 받아도 보증금 상환이 쉽지 않을 것으로 추정됐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전국 아파트 전세가격이 20% 떨어진 적이 있다는 점에서 단순 시나리오만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현재 전국 아파트 매매가격 대비 전세가격 비율은 지난달 73.7%까지 치솟았다. 2009년 1월(52.3%)에 비해 21.4% 포인트나 오른 것으로 1998년 12월 통계 작성 이후 최고치를 보였다. 주택가격 거품이 꺼지면 세입자들이 보증금을 제때 돌려받지 못할 가능성도 커진다. 한은은 “반환위험이 높은 전·월세보증금 규모는 현재 크지 않지만 향후 전·월세 시장이 경색될 경우 가계 전반의 금융 및 실물거래 부담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아파트 집단대출이 가계부채의 새로운 문제로 대두될 가능성도 제기됐다. 특히 아파트 집단대출은 정부가 내년부터 가계대출을 까다롭게 하는 가이드라인에서 적용이 제외된 대출인 만큼 이곳에서 부실이 발생할 경우 정부정책이 무력해진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현 정부 말기인 2017년이 고비가 될 전망이다. 조정환 한은 금융안정국장은 “내년과 내후년 주택 분양물량을 추정한 결과 집단대출이 월 3조∼4조원씩 늘어날 전망”이라며 “2∼3년 후 분양과열 지역을 중심으로 분쟁이나 부실화 우려가 있어 모니터링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자영업자 대출은 또 다른 뇌관이다. 올 6월 말 현재 자영업자 대출은 519조5000억원에 달한다. 이 중 자영업자가 받은 가계대출 128조9000억원(24.8%)은 저신용·고금리 비중이 높아 재무건전성이 취약한 것으로 파악됐다.
◇만성화된 기업 부실=기업들도 상황이 어렵다. 한계기업을 넘어 위기가 만성화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외부감사 대상기업 2만4125곳 중 ‘만성적 한계기업’으로 분류되는 기업은 2561개(10.6%)에 달한다. 통상 이자보상비율 1 미만(벌어들인 돈으로 이자비용을 내지 못하는 것) 기간이 3년 연속일 경우 한계기업(지난해 3471개)으로 분류하는데, 이 한계기업의 66.4%는 이런 기간이 5년을 넘어섰다.
재무상태가 악화된 기업들은 대외충격에 취약하다. 한은이 국내 경기둔화 및 금리인상 충격을 분석한 결과,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1.5% 포인트 떨어지고 시장금리가 1.5% 포인트 상승하면 유동성 위험기업 비중은 24.1%로 8.2% 포인트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익으로 이자도 내지 못하고, 빚이 순자산보다 많아 자금흐름이 나쁜 기업들이 늘어난다는 의미다. 최근에는 부채가 많은 대기업에서 유동성 위험이 커지고 있다. 기업의 위기가 국내 금융사의 부실로 번질 수 있다는 의미다. 조선·건설업 등 최근 빨간불이 켜진 업종에서 부실이 확대될 것으로 전망됐다.
◇신흥국 위기, 한국도 안심하긴 이르다=미국 금리 인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곳은 외국인 자금유출 우려가 크고, 원자재 수출 비중이 높은 신흥국이다. 한국의 경우 경상수지 흑자, 높은 대외건전성 및 국가신용등급으로 다른 신흥국과 차별화될 것으로 예상돼 왔다.
하지만 한은은 한국도 안전지대가 아니라고 봤다. 중국 등 신흥국에 대한 수출 비중이 37.6%에 달해 신흥국의 금융불안이 한국 금융시장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어서다. 현재 한국의 외화조달 여건이 나빠질 확률은 23.2%에 불과하지만 신흥국의 금융불안과 미 금리 인상의 부정적 영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면 이 확률은 75%로 3배 이상 뛰는 것으로 분석됐다. 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
전셋값 20% 급락땐 89만가구 ‘보증금 대란’… 우울한 한은 금융안정보고
입력 2015-12-22 2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