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진호 <8> “어려운 교회가 원하면…” 전국 각지 다니며 목회

입력 2015-12-22 19:06
2000년 6월 완공된 서울 도봉교회 모습.

1979년 서울 성북구 정릉교회에 부임한 뒤 내 삶은 한층 더 안정되고 여유로워졌다. 설교를 하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도 익숙해졌으며 교인들 역시 나를 잘 따랐다.

그런데 85년 9월의 어느 날, 같은 지역에 있는 월곡교회에 출석하는 장로님 한 분이 나를 찾아왔다. 내게 월곡교회 담임목사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내가 섬기던 정릉교회는 출석교인이 1000명이 넘는 큰 교회였다. 하지만 월곡교회는 교인이 400명 정도밖에 안 됐다. 장로님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전 저희 교회 목사님이 간경화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새 목사님을 청빙해야 하는데 너무 조심스럽습니다. 아무나 모셔올 수는 없잖습니까. 김 목사님이 훌륭한 분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저희 월곡교회를 맡아주십시오.”

‘6∼7년간 한 교회를 섬겨 부흥을 일군 뒤에는 다른 교회로 옮기자’는 신념이 있었지만 정릉교회를 떠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정릉교회 교인들과 많은 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월곡교회는 성전을 신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예배당은 훌륭했다. 하지만 담임목사 가족이 머물 사택도 없었다. 떠나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주님을 붙잡고 기도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이랬다. ‘교회의 크기가 무슨 상관이 있겠나. 저렇게 어려운 교회가 나를 원하니 가야 한다. 그것이 나의 사명이다.’

결국 월곡교회 담임목사직을 수락했고 나는 그곳에서 6년간 목회를 했다. 목자를 잃고 방황하던 교회는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월곡교회를 떠나던 91년 이 교회 교인은 1200명이 넘었다.

91년 서울 도봉구 도봉교회에 부임할 때 역시 고민이 깊었다. 당시 내 나이는 쉰두 살. 50대가 되었으니 전국 각지에 있는 교회를 섬기며 살았던 삶을 끝낼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회 인생의 마침표를 찍을, 은퇴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섬길 교회를 맡고 싶었다. 그곳이 바로 도봉교회였다.

도봉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뒤 겪은 일 중 기억에 남는 사건은 새 성전을 건축한 일이다. 때는 바로 IMF 외환위기로 실직자가 늘고 기업들 부도가 속출하던 98년이었다. 성전을 건축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건축비 35억원, 대지 구입비 15억원 등 총 50억원에 달했다.

바야흐로 은행 금리가 치솟던 시기였다. 성전 건축을 발표하고도 공사 계획을 접는 교회가 속출하던 때다. 성전 건축을 추후로 미루자는 목소리가 나올 법했다. 하지만 건축 연기를 주장하는 교인이 많지는 않았다. 만약 모든 교인이 성전 건축에 반대했더라면 포기했을 것이다. 성전 건축은 하나님의 사역을 이행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성전 건축을 강행했다. 일을 시작하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부족한 부분은 채워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98년 10월 공사가 시작됐고 착공 20개월 만인 2000년 6월 새 성전이 완공됐다. 3966㎡(1200평) 대지에 세워진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건물이었다. 20개월간 인부 1만명(연인원)이 공사에 동원됐지만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었다. 주민의 민원이 접수된 적도 없다.

건축회사 관계자는 이렇게 순조롭게 성전 건축을 완료한 케이스는 처음이라고 했다. IMF 외환위기 때 공사를 강행하면서 뜻밖의 혜택을 보기도 했다. 건축경기가 위축된 덕분에 예상보다 비용이 덜 들었다. 도봉교회 새 성전을 지으면서 나와 교인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