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컴컴해지면 쪽방촌을 지나가기가 무서워요.”
검정색 더플코트 깃을 여미며 박모(22·여)씨가 말했다. 서울 신촌의 학교 앞에서 버스에 올라 영등포등기소 정류장에 내린 그는 쪽방촌 앞에 이르자 발걸음을 재촉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육교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더니 건너편 아파트로 향했다. 서둘러 오른 계단 앞에는 폐지 수거용 손수레와 쓰레기 더미, 깨진 연탄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쪽방촌을 피하는 새 계단
지난 18일 서울의 수은주는 영하 6도까지 떨어졌다. 퇴근하는 직장인, 학원에서 돌아오는 학생들은 입김을 뿜어내며 영등포역 횡단 육교에 올랐다. 날이 저물고 기차 소리마저 잦아들자 육교를 찾는 발길도 뜸해졌다.
철로는 도로보다 우선일 수밖에 없어서 철길 주변에는 고가(高架)가 많다. 영등포역에서 뻗어나가는 철길을 가로질러 남쪽의 영등포동과 북쪽의 문래동을 잇는 이 육교도 그렇다. 어딘가 낡은 구석이 있는 역 주변에서 으레 찾아볼 수 있는 그런 고가다.
최근 이 육교에 작은 변화가 일고 있다. 문래동 쪽에 육교를 오르내리는 계단이 하나 더 들어섰다. 지난 7월 시작한 공사는 포장작업만 남기고 마무리됐다. 27일부터 안전펜스를 걷어내고 행인을 맞이한다. 기존에도 계단은 있었다. 남쪽과 북쪽에 하나씩 있는 기존 계단으로도 육교를 건너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왜 새 계단을 만든 것일까.
‘영등포역 횡단 보도육교 정비사업’은 지난해 서울시 주민참여 사업으로 선정됐다. ‘철길을 건너는 낡은 육교, 사고 위험 많아요’라는 사업명이 붙었고 예산 8억원이 책정됐다. 난간을 보수하고 투석방지용 펜스를 다시 설치해 육교의 안전도를 높이자는 취지다. 1970년대 세워진 육교는 곳곳이 움푹 파였고 펜스에 성긴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 정비사업의 핵심은 다른 데 있었다. ‘새로운 계단’이 그것이다. 북쪽 계단이 쪽방촌과 잇닿아 있어 그동안 주민 불만이 컸다. 특히 밤이 되면 육교를 건너기 무섭다는 여성들의 민원이 많았다. 길이 20m 새 계단은 육교를 건너는 주민들이 쪽방촌을 마주하지 않고 지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님비도, 핌피도 아닌 ‘씁쓸한 자화상’
철길과 접한 영등포동은 도로가 좁아 마을버스 말고는 노선버스가 지나지 않는다. 버스를 타려면 육교를 건너 문래동쪽 정류장으로 가야 한다. 여의도나 마포로 출퇴근하는 직장인, 목동 학원가로 향하는 학생, 백화점과 복합쇼핑몰을 이용하려는 주부들이 주로 육교에 오른다. 육교를 건너지 않으면 10분을 걸어 영등포역 대합실로 에둘러가야 한다. 영등포동 주민들에게 육교는 수고를 덜어주는 고마운 존재다. 다만 쪽방촌이 걸림돌이었다.
고교생 이모(18)군은 날마다 목동 학원에서 버스를 타고 문래동 정류장에 내린다. 영등포동 아파트로 가기 위해선 육교를 건너야 한다. 이군은 “낮에는 괜찮은데, 밤이면 계단 앞에서 술 마시는 노숙인들이 해코지할까봐 뛰다시피 한다”며 “가끔 ‘박카스 할머니’들을 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겨울이라 날씨가 추워진 탓에 요즘은 뜸하지만 육교 계단 앞은 인근 노숙인 쉼터에서 나온 노숙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는 곳이기도 하다. 쪽방촌 주민들도 어울려 소주잔을 돌리곤 한다.
직장인 권모(33·여)씨에게 퇴근길 마주하는 쪽방촌은 고역이었다. 그는 밤늦은 시간이면 어쩔 수 없이 육교를 건넌다. 권씨는 “보통은 영등포역 대합실로 둘러 가는데 밤 10시가 넘으면 대합실에 노숙인이 가득하다”며 “다른 길이 없으니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새 계단이 만들어지면 영등포동 주민들은 쪽방촌을 피해 버스정류장이 있는 큰길로 바로 나갈 수 있다. 육교 건너편 아파트에 산다는 김모(40)씨는 “계단 하나 더 만드는 건 님비(NIMBY·혐오시설이 자기 동네에 생기는 걸 기피하는 현상)도 핌피(PIMFY·복지혜택 등을 예상해 혐오시설을 유치하려는 현상)도 아니다. 선뜻 쪽방촌을 지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했다.
쪽방촌 주민들은 새 계단을 달가워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장모(52)씨는 “어차피 쪽방촌 주민들은 쪽방에만 있어서 계단이 생기든 말든 상관없다. 건너편 아파트 주민들에게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쪽방에 산 지 8년 됐다는 그는 이렇게 말하곤 육교 계단 앞 하수구에서 소변을 봤다. 쪽방에는 화장실이 없다고 했다.
글·사진=신훈 기자 zorba@kmib.co.kr
[기획] “쪽방촌 피해 가려” 새 계단 만든 영등포역 육교… “밤되면 무섭다” 민원에 새로 설치
입력 2015-12-22 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