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뿐 아니라 유럽 각국을 방문해보면 우리나라가 굉장히 편리한 나라임을 새삼 느낀다. 야간에 가로등이 안전하게 도로를 비춰주는 서울과 달리 몇몇 국가는 수도 한가운데인 데도 캄캄한 도로 사정으로 초저녁만 돼도 운전에 애를 먹기 일쑤다. 사실 국제원자력기구(IAEA) 가입 세계 160개국 가운데 전기 공급 사정이 넉넉한 국가는 선진 10여개국에 불과하다. 대부분 국가들은 전력 확보에 고민하고 있고, 베트남 등 많은 국가는 십수년째 원전 도입을 희망하고 있지만 자금난으로 좌절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을 목격할 때마다 원자력 도입을 결정했던 국가 지도자들과 맨주먹으로 원자력 기술 자립을 이뤄낸 선배 과학자들에게 감사드린다. 우리나라는 원전을 통해 두 차례 오일쇼크를 극복하고 경제성장을 견인해 왔다. 그리고 요르단,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사우디아라비아 등 해외에 원전을 잇달아 수출하는 쾌거를 이뤄왔다. 원자력이 안정적 에너지 공급과 산업경쟁력을 담보하는 주요 에너지원임에도 요즘 전기가 풍족해지면서 원자력 에너지의 중요성이 평가절하되는 풍조는 안타깝다.
원자력발전은 향후 20년간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전망이다. 이달 발효된 파리 기후변화협정은 2020년부터 전 세계 200여개국 모두가 온실가스 감축의무를 부담해야 한다. 세계 최대의 산유국인 사우디가 천연자원 고갈과 온실가스 배출 저감 대책으로 2032년까지 16기 원자력 도입에 총력을 기울이고 중국이 5000억 위안(90조원)을 투자해 2030년까지 세계 최대의 ‘원자력 강국’을 목표로 하는 것은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 ‘탄소세’ 같은 비용이 매겨질 경우 화석연료는 더 이상 저렴한 에너지원으로 남지 못할 가능성이 높고 만일 재생에너지가 전 세계 에너지를 충분히 공급할 수 없게 될 경우 원자력발전 보유 여부는 매우 중요해질 것이다. 원자력의 위험과 편익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안전한 원자력 이용의 지혜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그동안 원자력발전은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안전성과 사용후핵연료 처리에 대한 확실한 해결방법을 마련하지 못해 인식이 좋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올해 신규 건설 추진에서 사용후핵연료 관리계획 수립까지 원전의 전(全) 주기 관리체계가 구축돼 부담을 크게 덜게 됐다. 특히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협정을 필두로 후행핵주기 산업의 진전은 원전 반세기였던 지난 2009년 원전 해외수출에 버금가는 원자력산업의 진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향후 원자력 반세기를 위한 토대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용후핵연료 처분을 위해서는 양을 줄이는 게 절대적으로 중요하지만 그동안은 한·미 원자력협정에 따라 재활용이 제한돼 왔다. 그러나 이번 개정으로 사용후핵연료의 효율적 관리뿐 아니라 원전 연료의 안정적 공급, 원전 수출까지 청신호가 켜졌다. 또한 올여름 30년 만에 중저준위 방폐장을 준공하고 최초 처분까지 성공적으로 마쳐 선진국과 동등한 수준의 방사성폐기물 관리체계를 구축했다. 20개월간 다양한 국민의견을 모은 ‘사용후핵연료 관리에 대한 권고안’이 정부에 제출돼 사용후핵연료 관리대책 마련도 앞두고 있다.
필립 코틀러의 마케팅 3.0은 더 나은 세상을, 정부 3.0은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고자 하는 가치를 이야기한다. 원자력 3.0은 더 안전하게 국민생활에 이바지하겠다는 진정성에 다름 아니다. ‘제5회 원자력 안전 및 진흥의 날’을 맞아 저탄소 경제 견인, 해외수출 기여, 안전 최우선, 소통확대를 통한 원자력의 신뢰 증진을 다짐해본다.
이종인 원자력환경공단 이사장
[기고-이종인] 원자력 3.0
입력 2015-12-21 1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