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진호 <7> 33세에 교인 500명 교회 담임목사로 청빙 은혜

입력 2015-12-21 17:51 수정 2015-12-21 21:42
김진호 목사가 1970년대 초반 경기도 안산 능곡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시절의 모습.

경기도 안산 능곡교회를 섬기던 1970년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세례를 집전했다. 평생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며 살았던 어머니는 아들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다. 45년 전 일이지만 지금 돌이켜봐도 너무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고혈압으로 투병하던 어머니는 2년 뒤 세상을 떠나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 만약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면 목회자인 아들로서 나는 너무 큰 후회를 했을 것이다. 뒤늦게나마 어머니를 크리스천의 길로 인도한 일은 목사로서 내가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다.

72년 나는 목회지를 경남 마산 중앙교회로 옮겼다. 돌이켜보면 이때도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던 것 같다. 72년 4월의 어느 날, 당시 마산(현 창원시) 중앙교회로부터 연락이 왔다. 중앙교회 목사님이 병이 나서 설교를 못하게 됐으니 하루만 와서 교회를 섬겨달라는 요청이었다. 중앙교회는 당시 대전 아래에 있는 우리나라 감리교회 중에는 가장 규모가 큰 교회였다. 교인은 500명이 넘었고 장로님만 12분이 계셨다.

나는 최선을 다해 설교를 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나의 설교가 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 같다. 이후에 중앙교회는 나를 담임목사로 청빙했다. 당시 내 나이는 겨우 서른세 살. 30대 초반의 젊은 목회자가 큰 교회를 섬기게 된 일은 파격 그 자체였다.

중앙교회에서 79년까지 7년간 목회를 했다. 당시 마산은 수출자유지역으로 선정돼 우리나라 산업화의 전초기지 같은 역할을 했다. 지역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고 교회 역시 나날이 부흥했다. 교인은 조금씩 늘어 1000명 넘는 성도가 출석하는 대형교회로 자리 잡았다.

중앙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시절은 목회자로서 내 삶의 터닝 포인트나 마찬가지였다. 작은 농촌교회를 섬기던 젊은 목회자가 대형교회 목사로 거듭난 일은 감리교단 내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영적으로도 한 단계 성숙한 시기였다. 교인들 역시 나의 설교를 좋아했던 것 같다. 어린시절부터 웅변으로 다져진 화술은 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남들보다 호소력 강한 설교를 할 수 있었다.

79년 서울 성북구 정릉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정릉교회 역시 내가 부임한 뒤 성장을 거듭했다. 400여명이던 교인은 내가 이 교회를 떠나던 85년엔 1000명 수준으로 증가해 있었다. 85년부터 91년까지 섬긴 서울 성북구 월곡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부임 초기 400여명이던 교인 숫자는 6년 뒤 1200여명으로 늘었다. 섬기는 교회마다 부흥을 일구는 데 성공한 셈이다.

돌이켜보면 당시는 한국교회의 부흥기였다. 많은 목회자가 한국 개신교의 성장을 이끌었고 교회마다 부흥의 열매를 수확했다. 가끔씩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한국교회가 다시 그 시절의 부흥을 재연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회개하고 무엇을 개혁해야할까.

한 교회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계속 목회지를 옮긴 건 나의 신념 때문이었다. 30대 때부터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특정 교회에 안주해 머물러 있지 말자, 6∼7년간 한 교회를 섬겨 부흥을 일군 뒤에는 다른 교회로 옮기자. 대신 교회를 바꿀 때마다 최선을 다해 하나님과 교인을 섬기자.’

이 같은 생각을 한 이유는 평생 한 교회만 섬기는 목회자 중 매너리즘에 빠져 나태해져버리는 케이스를 종종 봐왔기 때문이다. 목회지를 옮길 때마다 힘든 일도 많았지만 언제나 내 곁엔 주님이 있었기에 그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젊음이 지나갔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