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성 의료 선교사, 애니 엘러스] 자신의 집까지 팔아 YWCA 회관 마련에 보태

입력 2015-12-21 20:29
엘러스 선교사의 기금으로 마련한 서울 YWCA 서대문회관 봉헌기념 광경. 서울 YWCA 제공
1907년 열렸던 ‘조선의 여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심포지엄 관련 기사가 ‘The Korea Mission Field’ 1907년 12월호에 소개됐다. 이용민 박사 제공
애니 엘러스는 자신이 직접 관여했던 교회와 여자기독교청년회,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 등을 중심으로 조선 여성들을 위한 선교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조선 여인들에게 가장 해주고 싶었던 짧은 말을 남겼다.

교회를 통한 여성 선교사업

애니 엘러스의 궁극적 선교 목적은 조선의 여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그 중심 무대는 교회였다. 엘러스는 번커와 함께 서울유니온교회에 출석했으며 감리회로 소속을 변경한 뒤에는 정동제일교회에 다녔다. 동대문교회로 옮기고 나서는 많은 교회들을 개척하는 일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삼청동교회 중곡교회 용두리교회 왕십리교회 한강교회 소귀교회 두무개교회 미아리교회 손가장교회 남대울교회 번리교회 각심사교회 등이 그녀가 남편과 함께 개척한 교회라고 1926년 6월 20일자 ‘기독신보’에 나와 있다.

1938년도 ‘재단법인 기독교조선감리회유지재단규칙급설명서’에서 이 교회들을 찾아보면 삼청동교회는 경성북지방, 정동교회와 한강교회는 경성남지방, 동대문교회 용두리교회 왕십리교회 미아리교회 우이교회(소귀교회) 등은 경동지방에 속해 있는데 이를 통해 엘러스가 늘 교회를 중심으로 사역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녀의 실질적인 선교 구역이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러스가 이 교회들 안에 부인회(여선교회)를 조직해 체계적으로 여성들을 위한 선교 활동을 펼쳐나갔음은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조선의 여성들과 아이들을 위한 헌신

남편을 양화진에 묻고 죽첨정 집에서 홀로 살던 엘러스는 그 주택을 팔아 기부하였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원에 1000원,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장학금으로 5000원, 여자기독교청년회 5000원, 공주영아관 4000원, 공주실수학교 1500원, 일본감리회여자사회사업부 5000원, 동대문교회 300원, 용두리교회 100원, 왕십리교회 100원이다. 이를 통해 당시 엘러스의 한국에 대한 선교적 관심을 살펴볼 수 있는데 배재, 영명 등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과 여성들을 위한 선교기금, 꼬마 아이들에 대한 관심, 그리고 각 교회의 여선교회 등으로 파악된다.

이는 엘러스가 조선에 오면서 자신의 사역에 대해 기대했던 ‘불쌍한 조선 여인들의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해주는 것’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그녀는 초심을 잃지 않고 그녀에게 남겨진 마지막 재산까지 모두 다 바쳤던 것이다. 그녀가 거금을 희사했던 여자기독교청년회와 일본감리회여자사회사업부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여자기독교청년회는 YWCA를 말한다. 일본감리회여자사회사업부는 일제 말 기독교조선감리회 여선교회의 수난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서울 YWCA의 창설에 있어서 애니 엘러스의 역할은 서울 YMCA의 창설에 있어서의 번커의 역할과 유사하다. 번커는 처음부터 YMCA의 창설에 깊은 관심을 갖고 1903년 10월 28일 공식적으로 서울 YMCA가 창설되기 이전에 배재학당 학생 YMCA를 조직해 저변 확대에 기여했다. 애니 엘러스도 처음부터 YWCA의 창설에 깊이 관여했다.

서울 YWCA는 1922년 12월 9일 공식적으로 창설됐다. 그러나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마땅한 건물을 마련하지 못해 선교사 개인 주택과 태화사회여자관, 서울YMCA 등을 전전했다. 엘러스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적극적인 모금활동을 펼쳤고 나중에는 자신의 집까지 팔아 기금을 보탰다. 이 돈으로 YWCA는 서대문에 독립적인 회관을 마련했다. 그리고 YMCA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직접 관여했던 정신여고와 이화여고 등을 중심으로 학생 YWCA가 조직됨에 따라 YWCA의 활동 저변이 크게 확대되었다. 지금도 YWCA는 어둡고 슬픈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곁에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을 하고 있다.

일본감리회여자사회사업부는 기독교조선감리회 여선교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미국감리회 해외여선교회는 메리 스크랜턴 여사를 처음으로 조선에 파송한 이후 조선의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선교 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이들은 이대병원 및 고대병원의 전신인 보구여관과 조선여자의학강습소 등을 중심으로 조선 여성을 위한 의료 혜택은 물론 조선인 여의사 양성에 크게 기여했으며 이화, 배화 등을 중심으로 고등고육을 포함한 여성 교육에 앞장섰다. 그리고 조선에서 최초로 소아과를 설치하고 유치원을 설립하는 등 아이들을 위한 사업도 널리 전개했다.

1899년 조직된 주한미감리회부인회를 통해 이들의 활동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 부인회의 회원은 해외여선교회 소속의 여선교사, 미감리회 해외선교부 소속 선교사 부인, 그리고 허락된 한국인 여성이었다. 엘러스는 이 부인회가 창설되었을 때부터 회원으로 활동했다. 1931년에는 기독교조선감리회 여선교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그리고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원 전도국 산하의 여자사업부로 통합되었다. 나중엔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을 거쳐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 되었다. 엘러스는 그녀가 몸담고 있었던 여선교회를 통해 조선의 여성들을 위한 선교활동을 헌금으로 이어갔던 것이다.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엄마’의 엄마 ‘됨’

1907년 ‘조선의 여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이 열렸다. 11명의 여선교사들이 각자 생각했던 내용을 발표했다. 대부분 교육이라고 했지만 애니 엘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The greatest need of Korea’s women is to KNOW Christ as their Savior; then to know that which will make them mothers in the broad and deep sense of that term(한국의 여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가 그들의 구세주이심을 아는 것이다. 그 다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넓고도 깊은 모습을 가진 어머니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아는 것이다)”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조선의 어머니. 이는 엘러스 선교사가 조선 여성들에게 가장 해주고 싶어 했던 말이었다.

이용민 박사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연구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