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일 내내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고인의 18주기를 앞둔 터에 마침 친구 어머니의 부음 소식에 그리움이 북받쳤다. 사실은 저물어가는 한 해를 돌아볼 때마다 겪는 원초적인 참담함 탓이 크다. 올해도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했고, 어머니는 평안의 다른 이름이니.
정치는 자기들만의 잔치에 머물렀고, 정책은 목소리만 높았을 뿐 믿음은 못 줬다. 남북관계도 협상·접촉이 재개돼 기대를 모았으나 대화는 또 결렬돼 좌절감은 컸다. 외교 또한 화려한 무대는 많았지만 실속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경제도 넉넉한 처지가 아니다. 세계 평균에도 못 미치는 성장률에 되레 빚만 크게 늘었다. 내년은 더 힘들겠다는 우울한 전망만 무성하다. 급증하는 ‘희망퇴직’이 절망적으로 부각되는 가운데 노동시장 개혁은 오독과 불만으로 가득하고, 그 와중에 주장과 불통이 넘쳤다.
불만은 기대치가 너무 높은 데서 오는 걸까. 하지만 특별한 계기를 제외하면 늘 부족한 듯 보이는 것이 삶이고 세상사가 아닌가. 경제위기 아닌 때가 거의 없었고, 6월 항쟁, 서울올림픽, 월드컵축구대회 등 몇몇 괄목할 성과들을 빼면 늘 고만고만한 시간들로 가득했다.
기다림이 문제일까. 밝고 긍정적인 귀결을 원했지만 연말에 늘 황망함만 가득해 지레 지치고 흔들린다. 아마 문제의 본질은 그 때문에 빚어지는 초조함에 있을 것이다.
196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가 쓴 ‘고도(Godot)를 기다리며’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이 작품은 허무개그와 유사하다. 밑도 끝도 없이 막연히 고도를 기다리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드라마가 없는 연극의 전형이다. 주인공 블라드미르와 에스트라공은 하릴 없이 고도를 기다린다. 무려 50년 동안이나. 딱히 스토리가 없다는 사실을 강점으로 내세워 관객들에게 각각 자기 얘기로 채우라는 주장처럼 보인다.
문제는 고도가 누구인지, 왜 기다려야 하는지, 언제 오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주인공들은 그저 기다리면서 경험과 기억을 말하고 때론 껴안았다가도 밀치고 말다툼하며 지긋지긋해하고 말장난하듯 농을 친다. 기다림의 지루함을 견디기 위해 온갖 광대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동반자살을 꾀하기까지. 물론 실패하지만.
마침내 블라드미르는 “사람들은 서서히 늙어가고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하다”며 기다려 온 긴 세월을 한탄한다. 하지만 기다림이란 결코 무료하거나 절망적이지 않다. 기다림에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고도∼’에는 확신이 없었다. 그것은 절망과 다르지 않다.
기다림을 말하자면 성탄절만큼이나 간절한 것은 없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587년 멸망한 이래 메시아를 염원했고 그렇게 출발한 기다림이 성탄으로 귀결됐으며, 성탄의 성취는 다시 올 메시아 얘기로 이어졌다. 성서의 역사는 기다림의 행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탄까지 수백년, 그리고 다시 2000여년 동안이나 이어진 그 기다림은 위대할 수밖에 없다.
성탄을 맞아 우리의 기다림도 꼼꼼히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블라드미르의 고백처럼 막연한 외침으로만 가득한 행보인지, 희망을 확신하고 있는 것인지. 무료함 때문에 그저 광대노릇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인지, 변혁의 새날을 열망하며 마음을 열고 기다림을 계속해 오고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기다림은 다시 올 메시아에 대한 준비다. 그 위대한 기다림은 교리적인 절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다림의 주제는 훨씬 더 포괄적이다. 가정과 가족의 회복, 갈등구조 청산, 평화통일, 동아시아 공존, 연대와 화평 등 무궁무진하다. 우리가 염원하는 세상을 향해 또 힘을 내서 바라보며 그리고 그렇게 기다리자. 메리 크리스마스!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
[조용래 칼럼] 성탄절, 그 기다림은 위대하다
입력 2015-12-20 1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