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진호 <6> 목회자 부족해 주일이면 교회 3곳 자전거로 순회

입력 2015-12-20 19:00
1974년 김진호 목사가 아내 및 세 아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이쯤에서 나의 아내 이야기를 해야겠다. 6남매 중 막내인 아내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상명여고를 졸업했고 신앙도 깊었다. 아내의 가족은 서울 노량진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아내를 만난 건 감리교신학대를 졸업하던 해인 1965년의 어느 날이었다. 노량진교회 전도사로 사역하던 이모할머니가 만남을 주선했다. 당시의 나는 볼품없는 청년이었다. 가진 것 없는 시골교회의 목회자였고 몸도 왜소했다. 아내는 얼마든지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나를 선택했다.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고 1년 뒤 경기도 수원 종로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내가 아내와 가정을 꾸릴 수 있었던 데는 장모님의 지원이 있었다. 농촌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에게 고명딸을 시집보내는 게 마뜩찮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장모님은 항상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셨고 딸과 잘 되기를 바랐다. 당신의 딸이 영적으로 충만한 크리스천과 결혼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장모님은 최고의 우군이자 우리 두 사람이 결혼에 골인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조력자였다.

결혼을 앞두고 있던 시점에 나는 경기도 화성 동탄교회로 파송됐다. 화목한 집안에서 귀하게 자란 아내는 농촌에서 제2의 삶을 시작했다. 아내는 힘들 때가 많았을 텐데도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동탄교회 외에도 화성 지역 교회 2곳을 더 섬겨야 했다. 60년대에는 한국교회에 목회자가 부족해 목사 한 명이 교회 여러 곳을 섬기는 일이 흔했다. 주일이면 오전에 동탄교회에서 예배를 집전한 뒤 자전거를 타고 6㎞ 거리에 있는 영천교회로 향했다. 그곳에서 교인들과 다시 예배를 드렸다. 이 지역엔 목내리교회라는 곳도 있었는데 그곳 역시 나의 임지 중 한 곳이었다. 목내리교회 예배는 같은 지역에서 사역하던 다른 목회자와 번갈아가며 집전했다.

첫 아이가 태어난 곳도 68년 이곳에서였다. 아들이었다. 그리고 70년과 75년에 각각 둘째아들과 셋째아들이 태어났다. 외롭고 쓸쓸한 성장기를 통과한 나는 그렇게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막내아들은 5년 전 비명에 세상을 떠나 하나님 품에 안겼다. 첫째와 둘째는 결혼해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 장남은 현재 한 생수회사에 다니고 있으며 둘째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면서 나는 처음으로 안정감을 느꼈다. 굴곡진 세월을 통과해 비로소 평범한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행복이고 평안이라는 것을 처음 실감한 것도 이때쯤부터다. 설교를 하고 교인을 돌보는 일에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첫 임지인 경기도 군포 둔대교회에서의 목회는 실습의 성격이 강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신학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탄교회 때부터는 달랐다. 수많은 어린 양을 돌봐야 하는 목자로서의 책임감을 강하게 느꼈다.

69년 경기도 안산 능곡교회로 다시 파송됐다. 이때 나는 어머니를 모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조부모 품에서 자라면서 나는 어머니와 너무 오래 떨어져 살았다. 어머니는 평생 고생만 하신 분이었다. 뒤늦게라도 효도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안산에서 어머니를 모시게 됐다. 하지만 1년만인 70년 어느 날, 어머니는 갑자기 고혈압으로 쓰러지시고 말았다. 어머니는 2년간 투병하다 72년 세상을 떠나셨다.

명절 때면 자식들을 데리고 안산에 있는 어머니 묘소를 찾곤 한다. 어머니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나는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불효자다.

정리=박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