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스코틀랜드 연안의 작은 섬 그뤼나드. 독일 나치의 생물학전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군이 극비리에 실험을 한다. 탄저균을 생물학무기로 이용하는 탄저병 실험이다. 양들을 울타리에 넣고 탄저균 포자를 담은 소형 폭탄들을 터뜨렸다. 3일 후부터 양들이 죽어가면서 탄저균 위력은 입증됐다. 문제는 섬 전체에 퍼진 탄저균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 무려 48년이 걸렸다는 것이다. 그 기간 이 섬은 누구도 살 수 없는 불모의 땅이 됐다.
탄저병을 일으키는 탄저균은 흙 속에 서식하는 세균으로, 생명력이 강해 10년 이상도 생존한다. 감염되면 면역세포에 손상을 입혀 쇼크를 유발하며 심하면 죽음에 이른다. 호흡기형, 소화기형, 피부형 3가지가 있다. 호흡기형은 초기에 항생제를 복용하지 않을 경우 치사율이 90% 이상이다. 치명적 병균이어서 2차대전 때 미국 소련 등이 생물학무기로 개발했다. 일본은 731부대가 탄저균 등으로 생체실험을 해 악명이 높다. 탄저균 100㎏이 대도시 상공에 살포되면 최대 300만명을 살상할 수 있단다.
탄저균은 테러에도 사용된다. 미국에선 2001년 9·11테러 직후 탄저균이 우편 테러에 이용돼 시민들을 공포에 몰아넣은 적이 있다. 일명 ‘백색가루’로 불리는 분말 형태의 탄저균을 우편물에 넣어 우송한 것으로, 22명이 감염돼 이 중 5명이 숨졌다.
이런 탄저균 실험이 1000만 인구의 서울 한복판에서 우리 정부도 모르게 미군에 의해 실시됐다니 섬뜩하기만 하다. 지난 4월 탄저균이 미국에서 경기도 오산 미군기지로 잘못 배달된 사건과 관련, 엊그제 공개된 한·미 합동실무단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당초 미군 해명과 달리 용산기지에도 2009년부터 15차례 탄저균 샘플이 보내졌다. 오산기지에는 페스트균까지 반입됐다. 미군이 현장 공개를 거부해 자료에만 의존한 결과니 실체의 상당 부분이 가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의혹투성이다. 합동 조사 결과는 여론 무마용에 불과하다. 반입 절차를 개선하기로 했다지만 미봉책이다. 거짓말을 한 미군을 믿기도 어렵다. 그런데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할 우리 정부는 미군 측만 옹호하니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대한민국이 주권국가 맞는가.
박정태 논설위원 jtpark@kmib.co.kr
[한마당-박정태] 죽음의 탄저균
입력 2015-12-18 1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