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체예술.’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내년 3월 27일까지 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세계적 거장 윌리엄 켄트리지(60)의 국내 첫 개인전 ‘주변적 고찰’을 정의하는 단어다. 개인전임에도 3개의 전시장과 복도 공간까지 할애하는 전폭적 지원을 했다.
드로잉, 설치, 판화, 영상, 음악, 공연까지 아우르며 오감을 자극하는 전시는 낯설고도 신선하다. ‘드로잉 애니메이션’을 상영하는 ‘극장용 무대’가 곳곳에 설치돼 있고, 배경 음악으로 나오는 아프리카 타악기나 대중가요에 심장이 뛰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켄트리지는 1990년대 초반부터 아파르트헤이트(남아공의 흑인 차별정책) 하의 인종차별과 폭력을 소재로 한 드로잉 애니메이션으로 국제 미술계에서 주목받았다.
초기 날카로운 에칭 판화로 장갑차에 희생된 시위대 얼굴을 겹겹이 표현하는 등 유혈진압을 직접적으로 고발했던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에는 트레이드마크가 된 ‘목탄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진화시켜갔다.
현실 비판 수단으로서 목탄과 애니메이션의 결합은 마력이 있다. 목탄 그림은 밑그림 정도로 치부된다. 그런데 거칠고 투박한 목탄은 유화나 수채화가 따를 수 없는 선동성과 문지르면 뭉개지는 부드러움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는 여러 장의 종이에 그린 것이 아니라 한 장의 종이만을 이용해 처음 이미지를 지우고 다시 그려가는 기법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작품들이 내면적 성찰과 고뇌까지 보여주며 감동을 주는 이유다.
1994년 작 ‘망명 중인 펠릭스’, 2003∼2004년 작 ‘조류 테이블(tide table)’, 2011년 작 ‘다른 얼굴들(other faces)’ 등은 목탄 애니메이션의 묘미가 드러나는 대표작들이다. 아파르트헤이트 하에서는 백인구역과 흑인구역의 구별이 엄격했다. 심지어 해수욕장마저 달랐다. 차별이 청산되자 흑인들은 백인구역으로 몰려갔다. 결과는 그곳이 다시 흑인구역이 됐을 뿐이다. 일상 속에 뿌리내린 관습적 차별은 견고했던 것이다.
거리에서의 흑인 폭동, 무심한 듯 신문을 보는 백인 중산층 남자, 흑백이 구분됐던 유년시절 바닷가에서의 해수욕 장면, 경제 상황을 보여주는 그래프, 흑인구역과 백인구역을 표시한 지도, 걸어 다니는 기괴한 의자…. 애니메이션에는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드는 장면들이 시시각각 바뀌며 충돌한다.
그의 현실 비판은 남아공 사회를 넘어선다. 이웃한 남서아프리카 독일령 나미비아에서 독일군에 의해 자행된 인종학살사건, 중국 사회의 교조주의 등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특히 나미비아 인종학살 사건은 그림자 연극 형식을 차용한 ‘미니어처 극장’의 실험적인 기법을 써서 눈길을 끈다.
예술이 얼마나 사회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작가적 고민은 흰 와이셔츠 입은 배불뚝이 백인 남자 이미지를 곳곳에 등장시킨 데서 엿볼 수 있다. 자화상으로 보이는 이 남자는 사색에 잠겨 창밖을 보기도 하고, 의자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의미 없는 동작을 반복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런 표정으로 악기를 불기도 한다.
한국에서 1980년대 민중미술은 시위 현장 곳곳에 굵은 주먹을 치켜든 대형 걸개그림 등으로 내걸리며 사대적 소명을 충실히 했다. 그러나 형식적 민주화가 달성된 이후에는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외면 받았다. 켄트리지가 보여주는 목탄 애니메이션 형식은 동력을 잃었던 민중미술이 기술의 진보와 함께 어떻게 변신을 꾀해야했는지 답을 보여주는 것 같다. 달라진 시대의 미술언어는 과거 언어의 포기가 아니라 확장하며 나가야 했던 것이다.
켄트리지의 오늘은 직업적 편력의 소산이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배운 뒤 요하네스버그 아트 파운데이션에서 미술을 배웠고, 연극과 TV영상 시리즈 아트 디렉터로도 활동했다.
거장의 작품 전시를 위해 3개 전시장을 할애하는 파격적인 지원을 했지만 넓은 공간을 장악하지 못한 채 작품들이 방만하게 흩어져 있어 아쉽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목탄 애니메이션’으로 부조리한 사회 꾸짖다… 세계적 거장 윌리엄 켄트리지 국내 첫 개인전
입력 2015-12-21 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