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쇼몽’이라는 영화가 있다. 어떤 나무꾼이 라쇼몽이라는 문 아래에서 함께 비를 피하던 사람들에게 그날 자신이 목격한 살인 사건에 대해 털어놓게 된다. 나무꾼은 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갔다가 사무라이의 시체를 발견하고 관청에 신고한다. 사건과 관련된 인물은 살해된 사무라이, 그의 아내, 산적이다. 이들은 관청에 끌려와 차례로 사건에 대해 증언한다. 죽은 사무라이는 무당의 입을 통해 말한다. 그런데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이들의 증언은 모두 제각각이다. 흥미롭게도 도적과 아내 둘 다 자기가 사무라이를 죽였다고 하고, 사무라이조차 스스로 자결했다고 주장한다. 모두들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는 의도다. 나무꾼은 관청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지만, 라쇼몽 아래에서는 자기가 본 사실을 이야기한다. 그것 또한 다른 증언들과 전혀 다르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진실은 없다는 이야기는 굳이 영화를 예로 들어 말하지 않아도 이제는 누구나 동의하리라 믿는다. 내 기억과 관점에 의한 진실은 다른 사람의 기억과 관점에 의한 진실과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의도적 거짓말과는 다르다. 라쇼몽의 증인들은 다른 사람에게는 거짓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의 관점에서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각자의 진실이 중첩되어 어렴풋이 세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입을 모아 한 치 어긋남 없이 동일하게 보여주는 관점이나 태도는 오히려 그것이 진실과 거리가 멀다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지상파든 어디든 방송에서는 거의 언급도 되지 않는 청문회가 열리고 있다. 그 자리에 나온 증인들은 일관성 있게 말한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모릅니다.” 사실이란 어쩌면 참과 거짓이 아니라 힘의 기울기 문제일지도 모른다. 거짓은 자주, 조직적이며 힘이 세다. 늘 흔들리는 진실은 오히려 소외된 자, 낙인찍힌 자, 배제된 자의 관점에서 싹트기 마련이다.
부희령(소설가)
[살며 사랑하며-부희령] 진실과 거짓
입력 2015-12-17 1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