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철도가 달려온 길은 근대의 길, 고통의 길”

입력 2015-12-18 04:05
20년 경력의 철도 기관사이자 철도를 공부하는 게 취미인 ‘철도 덕후’, 그리고 두 권의 책을 쓴 ‘철도 작가’, 박흥수씨가 지난 16일 본인의 일터인 서울 은평구 수색역 인근 수색차량기지에서 새 책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곽경근 선임기자
“이 책은 철도를 타고 떠나는 근대 여행기이다.” 철도의 역사를 통해 영국, 미국, 일본, 조선의 근대사를 들여다보는 책이 나왔다.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계’라는 제목 아래 ‘기관사와 떠나는 철도 세계사 여행’이란 부제가 달려 있다. 저자 설명을 보니 20년 경력의 현직 기관사다. 기차를 모는 기관사가 어떻게 이렇게 우아한 책을 썼을까? 놀라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겨보다가 16일 서울 은평구 수색역 인근 수색차량기지로 찾아갔다. 근무 중이던 박흥수(49)씨가 점심시간을 내줬다.

-‘철도의 눈물’에 이어 두 번째 책이다.

“2013년 나온 ‘철도의 눈물’은 정부의 철도 민영화 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쓴 책이었다. 이번 책에는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얘기를 담았다. 첫 책을 냈을 때 사람들이 선생님이라고도 하고 저자라고도 불러주는데 참 어색했다. 이번에는 어디 가서 ‘내가 이 책을 쓴 사람이오’ 그렇게 얘기할 만한 책은 된다고 생각한다.”

-철도를 주제로 한 국내 교양서는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철도 책이 워낙 없는데다 국내 필자가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쓴 철도 교양서는 처음이라고 하더라. 일본에는 철도에 대한 책이 무척 많다. 한국에서도 누군가 좋은 책을 써주길 기다리기만 하다가 내가 아는 걸 한 번 써볼까 그러면서 책을 쓰게 됐다.”

-철도 공부는 언제 했나?

“책 읽는 걸 좋아한다. 이런저런 책을 다양하게 읽는 편인데, 철도에서 일하니까 철도에 대한 책들도 많이 보게 된다. 그러다가 빠져든 것이다. 철도에는 너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다. 특히 근대라는 시간대는 철도를 빼면 설명할 수 없는 게 많다. 주식회사라든가 시간 개념이라든가 로비스트라든가, 이런 게 다 철도의 생성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또 철도가 산업자본주의시대의 가장 중심적인 기계장치이다 보니까 당시의 전쟁이나 식민지도 철도 중심으로 전개됐다.”

-기관사 일이 꽤 힘든 것으로 아는데 언제 책을 읽었나?

“근무시간이 꽤나 불규칙한데 시간이 날 때 어디서든 책을 읽는 편이다. 집이 강동구라서 출퇴근 시간에도 독서를 꽤 할 수 있다. 읽다보니 언제부턴가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에 몇 권이나 읽나?

“100권정도 책을 사고 120∼130권 읽는 것 같다. 시립도서관에도 자주 간다. 도서관까지 가는 길을 참 좋아한다.”

-철도 역사를 다루면서 특히 부각하고 싶었던 부분은?

“철도의 역사에는 눈물과 한, 고통이 배어있다. 그런 고통의 철도를 얘기하고 싶었다. 철도의 역사를 관통하면서 철도가 달려온 길이 근대 이후 자본주의의 길이었고, 누구도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예컨대, 아우슈비츠가 ‘절멸 수용소’가 된 것은 거기가 유럽 철도의 집결지였기 때문이었다. 또 일본군에게 처음으로 처형당한 독립운동가들에게 붙은 죄목이 철도파괴범이었다. 침목 하나, 철로 하나에 사람들의 눈물과 땀이 배어 있다. 공부를 하다 보니까 내가 매일 달리는 선로가 그냥 선로가 아니구나 알게 됐다.”

-철도는 흘러간 주제처럼 보인다.

“철도는 교통수단이지만 어떤 교통수단과도 다른 특징이 있다. 개인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동차는 물론이고 배나 비행기조차 개인화가 가능하지만 철도는 지금도 철저히 공적인 교통수단으로 남아있다.”

-지금 우리가 철도에 주목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1980년대부터 철도는 사양산업이었고 수송률은 계속 하락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유럽은 90년대 중반부터 철도 중심으로 교통체계를 다시 개편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기후변화 이후 철도에 다시 주목하는 중이다. 기후변화를 막고 교통 혼잡과 국토 파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철도를 중심으로 교통체계를 개편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철도의 의미는 보다 각별하다. 남과 북을 연결하고 대륙으로 나가는 꿈을 간직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경성역(현 서울역)은 국제적인 스테이션이었다. 국제선 표를 살 수 있었다.”

-마지막에 자전거 얘기를 붙였다.

“인간이 만든 교통수단 중 가장 매력적인 건 자전거라고 생각한다. 자전거는 지극히 개인적인 교통수단이다. 철도는 철저하게 다중적이다. 자전거와 철도가 결합한다면 굉장히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유럽의 교통체계를 편안하게 느끼는 이유는 자전거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자전거가 핵심적인 교통수단이 되려면 철도와 연결돼야 한다.”

-철도에 대한 책을 또 쓸 건가?

“앞으로도 철도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현재 한 주간지에 ‘유라시아 기차 횡단기’를 연재하고 있는데, 그걸 묶어서 책을 낼 예정이다. 또 연해주와 만주에 살았던 근대의 조선인들과 관련한 철도 이야기도 쓰고 싶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