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를 잡았다며 경찰이 내는 보도자료마다 ‘검거 경위’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범인을 잡기 위해 밤을 새우고 잠복했던 숱한 시간은 서너 줄 짧은 문장에 가려진다. 지난 10일과 15일, 이틀에 걸쳐 서울 마포경찰서 강력2팀 형사들과 24시간 계속되는 당직근무를 함께했다. 쫓고, 뒤지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그들의 시간을 곁에서 지켜봤다.
“남자가 해야 할 일이 있잖아”
세 딸이 활짝 웃고 있는 휴대전화 배경화면에 손가락을 올렸다. 아이들을 쓰다듬듯 패턴을 그려 잠금 화면을 열자 용의자 사진이 떠올랐다. 어느새 ‘아빠 미소’는 사라지고 ‘형사 눈빛’이 돼 있었다. 노영진(36) 형사는 주거침입 절도범을 쫓고 있었다. 현장에서 확보한 CCTV 영상 속 용의자 얼굴을 놓고 비슷한 수법의 전과자와 맞춰 보기 시작했다.
수사보고서를 들추자 책상 위에 놓인 유리 아래로 세 딸의 사진이 드러났다. 모니터 앞에는 결혼하기 전 아내가 선물해준 빵 인형이 놓여 있다. 동료 경찰관인 아내는 눈, 코, 입이 달린 빵 인형을 선물하며 “항상 지켜보고 있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남자들이 해야 할 일 있잖아.” 당직하고 쉬는 날엔 뭘 하느냐 묻자 이상돈(48) 팀장은 이렇게 답했다. “청소기 돌리고, 쓰레기 버리고, 가끔 요리도 해” 하며 멋쩍게 웃는다. 그는 “만날 집에 없으니 알아서 기는 거지, 눈치껏”이라고 덧붙였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남자는 형사지”라고 말하던 그였다.
김학만(41) 형사의 휴대전화 배경화면에는 아들 사진이, 김재홍(35) 형사의 휴대전화에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내 사진이 담겨 있다. 아직 미혼인 막내 김완희(26) 형사 휴대전화엔 아무것도 없다. 이 남자들이 한 팀을 꾸려 올해 검거한 범인만 100명이 넘는다.
“출동하면 괴물로 변할 수 있어”
15일 오후 4시30분쯤 무전이 울렸다. ‘자해’ 신고였다. 인근에 있던 홍익지구대 순찰차가 출동했지만 당직인 강력2팀도 나가야 했다. 인질극이나 자살로 커질 수 있어서다.
팀장의 “가자” 한마디에 절도범 찾으려고 3시간째 CCTV를 확인하던 형사들의 말도 짧아졌다. “차 키.” 15년차 강력팀 데스크 김학만 형사가 5개월차 막내 김완희 형사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하루 종일 운전하던 막내는 말없이 키를 건넸다. 긴급 상황에서는 베테랑이 운전대를 직접 잡는다. 사이렌을 울리고 다른 차량을 길가에 세우며 거칠게 현장으로 달려갔다.
사기당해 억울하다는 50대 남성은 양손에 각각 흉기를 들고 있었다. 발가벗은 상반신에는 이미 상처가 5곳 이상 보였다. 막내 김 형사는 어느새 방검(防劍) 장갑을 끼고 있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이상돈 팀장이 직접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동안 넋두리를 들어주던 그는 “이렇게 해서는 억울한 게 풀리지 않는다. 우선 치료를 받고 경찰서로 가서 얘기하자”고 달랬다. 설득 끝에 남성은 구급차에 올랐다.
상황을 정리하고 돌아오는 차 안. 선배들이 “너 혼자 방검 장갑 꼈더라?”며 막내를 놀렸다. 막내 김 형사는 “무슨 일 있으면 가장 먼저 들어가려고 했습니다”라고 진지하게 답했다. 선배들은 “너, 나중에 지켜본다”며 또 웃는다. 내심 기특해하는 눈치였다. “분위기가 좋다”고 말을 건넸더니 “출동하면 괴물로 변할 수 있어”라는 답이 돌아왔다.
“절도범은 나가는 걸 잡는 게 진리야”
다시 침입절도 현장으로 돌아왔다. 도둑맞은 집 주변에서 범인 행적을 찾아야 했다. 형사들은 ‘퍼즐 맞추기’라고 설명했다. “절도범은 들어오는 게 아니라 나가는 걸 찾아야 해.” 강도는 범행 대상을 미리 물색하고 오기 때문에 출발지에서 곧장 범행 장소로 가곤 하지만, 절도범은 주변을 배회하다 범행 장소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물건을 훔친 뒤에는 심리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자기 집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도주로를 찾아야 했다.
용의자가 한순간 CCTV에서 모습을 감춘 사실이 확인되자 거리 회의가 열렸다. 용의자의 행방을 두고 그동안의 경험과 논리를 바탕으로 각자 의견을 제시했다.
“버스나 승용차를 탄 것 같은데요.” 김재홍 형사가 말했다.
“벽 타는 애들은 거의 혼자지?” 이상돈 팀장이 물었다. 혼자 범행할 때 직접 운전해서 다니는 절도범은 드물다고 한다.
“여기 버스 번호 확인하고 시간대 확인해 볼게요.” 노영진 형사가 답했다.
버스로 가닥이 잡히자 김재홍 형사는 “앞으로 법학도라고 불러주세요”라며 웃었다. 대학을 나오지 않은 그는 쉬는 시간을 쪼개 수업을 듣는 방송통신대 법학과 3학년이다.
이들은 CCTV 확인작업을 ‘깐다’고 표현했다. 용의자의 이동경로에 있는 모든 CCTV를 시간대별로 일일이 들여다보는 일이다. CCTV에 용의자가 보인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누구인지 알 길이 없다. CCTV 확보는 수사의 첫걸음일 뿐이다. 인적사항이 확인되지 않을 때는 CCTV에서 용의자가 버린 담배꽁초를 찾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내기도 한다.
“백번 속더라도 가야지”
16일 오전 1시쯤 누군가 집 베란다 문을 열고 들어오려 해서 방 안에 숨어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강력2팀이 바로 출동했다. 현장에서 침입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맞은편 건물에 숨어 있는 사람이 있는지도 확인했다. 현장에 온 경찰들은 오인신고로 결론을 내렸다.
다음은 ‘잠복근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 새벽 시간에 빈 가게를 터는 사건이 잇따른다고 했다. 시계는 오전 2시를 가리켰다. 사건이 일어났던 가게 근처 골목에 차를 세웠다. 이상돈 팀장이 행인들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봤다. 잠복은 오전 3시까지 이어졌다.
“백번 속더라도 가야지.” 잇단 허탕에 지칠까봐 이상돈 팀장이 입을 열었다. 19년차 형사인 그도 신고를 받고 현장에서 검거한 강력사건은 한 번뿐이라고 했다. “이렇게 고생을 해야 잡아. 백번 속더라도 가야지. 형사는 요행 안 바라.”
오전 9시, 당직은 끝났다. 공식적으로는. 그런데 퇴근하는 이가 없다. 밤새 확보한 CCTV와 사건 수사기록을 정리했다. 낮 12시가 돼서야 하나둘 사무실을 떠났다. 다시 하라면 형사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던 이들이었다. “막내가 침입절도 한번 잡아보고 싶다고 열정을 갖고 덤비는데, 보탬이 돼야지.” 이상돈 팀장이 막내 김완희 형사의 보고서를 다시 들여다봤다.
글·사진=김판 기자 pan@kmib.co.kr
[르포] 출동·대치·잠복근무… “백번 속아도 형사는 현장에 간다”
입력 2015-12-17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