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기수] 인간다운 죽음을 위하여

입력 2015-12-16 17:34

“바쁘신 가운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여러분에게 받은 사랑과 위로 덕분에 건강할 때는 물론 긴 투병기간에도 행복했습니다.

이제야 저의 장례식을 통해 고맙다는 말씀을 전하게 됨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죽음은 많은 분이 이미 간 길이고, 또 모두 갈 길이기 때문에 삶을 당연하게 여기듯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만 사랑하는 사람, 익숙한 일상과 영원히 헤어진다 생각하면 아득한 느낌인 것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의 소중한 인연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제게 주어진 가장으로서의 소임은 부족한 대로 마무리를 졌습니다. 많은 분의 축복 속에 아들의 혼사를 치렀습니다. 가장 슬퍼할 제 처와 사랑스러운 딸은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리라 맡기고 나니 홀가분해졌습니다. 제가 없더라도 두 사람을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근 한 상가 입구에 걸린 고인(故人)의 특별한 인사말이다. 다른 회사 후배가 부친상을 당한 지인을 위로하러 갔다가 보고 페이스북에 올린 것이다.

“(세상에)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 그러나 인간다운 죽음은 있다!” 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부키)의 저자 아툴 가완디(50·미국 보스턴 브리검여성병원 외과 의사)의 지적이다.

국회 보건복지위는 지난 9일 전체회의에서 ‘웰다잉(well-dying·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자연스럽게 죽음을 준비하는 행위) 법’으로 불리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 법안은 거의 그대로 내년 2월 임시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및 본회의에서 의결되고, 2018년부터 시행된다. 임종 과정의 말기 환자에게 웰다잉에 대한 선택권을 법적으로 부여하는 것이다.

행복한 죽음은 행복한 삶만큼 중요하다. 이 방정식을 풀려면 무엇보다 합당한 의료지침 개발과 질 높은 호스피스·완화의료 서비스 제공, 불우 환자에 대한 경제적 지원 정책 등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죽기 일보 직전까지 적극적으로 항암 치료를 받는 말기 암 환자가 97.4%에 이르고, 완화의료 서비스에 몸을 맡기는 환자는 2.6%에 불과한 실정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부설 건강보험정책연구원이 말기 암 환자 치료 경험이 있는 전국 44개 상급종합병원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완화의료 서비스 이용률이 이렇게 낮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절대 부족한 제도권 호스피스 시설이다. 정부 지원이 없고 운영도 안 되니 병원들이 투자를 하지 않은 탓이다. 무엇보다 부족한 호스피스 병상을 늘리는 정부 정책이 필요한 이유다. 가정호스피스 장려를 위한 공적 간호서비스 지원 같은 사회적 안전장치 마련도 시급하다.

웰다잉에 대한 범국민 사고전환운동도 실시해야 한다. 존엄한 죽음에 대한 인식, 특히 인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게 삶의 포기가 아니라는 것을 재인식시킬 필요가 있다. 웰다잉법은 말기 질환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됐을 때 이를 부인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이는 임종 문화와 풍토에서만 정착이 가능하다. 산 사람 원이라도 없게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다 해본다는 식으로 죽음을 부인하는 풍조가 팽배한 사회에선 성공하기 어렵다. 그러면 호스피스·완화의료에 대한 법적, 제도적 장치가 있다 한들 무용지물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적 돌봄과 배려가 없는 제도는 한낱 허울이자 형식에 불과할 뿐이다.

이기수 의학전문기자 ks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