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얼마나 완벽하게 둥근지 인류가 눈으로 확인한 것은 1972년이었다. 그해 12월 미국의 유인우주선 아폴로 17호가 발사됐다. 달을 향해 날아가던 우주비행사 3명이 스웨덴제 70㎜ 하셀블라드 카메라로 지구를 촬영했다. 이륙 5시간6분 만에, 4만5000㎞ 떨어진 곳에 가서야 지구를 통째로 렌즈에 담을 수 있었다.
마침 태양이 아폴로 17호를 가운데 놓고 지구의 반대편에 있어 둥근 지구가 일그러짐 없이 렌즈에 잡혔다. 동지(冬至)를 앞둔 때라 하얀 얼음에 덮인 남극대륙도 선명했다. 푸른 바다와 불그레한 아프리카, 인도양의 사이클론까지 어우러진 그 모습이 아름다워 나사(NASA)는 이 사진에 ‘블루 마블(푸른 구슬)’이란 이름을 붙였다.
끝이 어딘지 모를 캄캄한 우주에서 홀로 반짝이는 사진 속 지구는 자칫 구슬처럼 깨질 것만 같았다. 외로워 보여서, 약해 보여서,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사람들에게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진은 ‘지구의 날’(4월 22일) 행사의 상징이 됐고, 환경운동이 대중에게 확산되는 촉매 역할을 했다.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은 1993년 백악관에 입성하자 나사에 초대형 블루 마블을 요청해 집무실에 걸었다. 그가 백악관에 머문 8년간 이 사진도 그 자리를 지켰다. 1998년 그가 “지구의 다른 곳이 찍힌 블루 마블을 보내 달라”고 했을 때 나사의 답변은 “그런 건 없습니다”였다. 아폴로 17호 이후 인류는 달에 가지 않았다. 완벽하게 둥근 지구의 ‘풀샷’은 이 사진 하나뿐이었다. 여러 버전이 있지만 인공위성이 조각조각 찍은 걸 합성한 것이다.
고어는 나사 국장에게 “지구의 환경 변화를 보여주는 풀샷을 우주에서 실시간 전송해줄 위성을 개발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우리 인류는 모두 같은 행성에 살고 있으며, 같은 위험과 기회를 맞았으니 같이 책임져야 한다는 걸 세계에 알리자”는 취지였다. 나사는 ‘고어샛(Gore+Satellite)’이란 별칭의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만약 그가 2000년 대선에서 승리했다면 고어샛은 훨씬 일찍 발사됐을 것이다. 부시 정권에서 캐비닛에 들어가 있던 이 프로젝트는 오바마 정권이 출범한 뒤 재개돼 올 2월 심우주기상관측위성(DSCOVR)이란 공식 명칭으로 발사됐다. 160만㎞를 날아 예정된 궤도에 올라선 7월, 고어샛은 17년 전 고어가 나사에 주문했던 ‘다른 블루 마블’을 지구로 전송했고 세계 언론에 이 사진이 실렸다.
그로부터 5개월 뒤 195개국이 프랑스에 모여 온실가스를 함께 줄이자는 ‘파리협약’을 체결했다. 모태가 된 ‘교토의정서’가 나온 건 1997년이다. 고어가 부통령일 때 주도했던 미완의 의정서는 고어샛처럼 18년이 지나 온전한 협약이 됐다.
2001년 백악관에서 나와 환경운동가로 변신한 고어는 친환경 기업에 투자하는 회사를 차리고 국제 환경단체 기후프로젝트(CRP)를 설립했다. 기후변화의 위험을 경고한 2006년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부터, “한국이 역사적인 법안을 통과시켰다”며 2012년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 도입을 팔로어 240만명에게 알린 트윗까지 그가 줄곧 해온 일은 세계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15년을 보낸 뒤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를 앞둔 지난달. 고어는 AP통신 인터뷰에서 이례적으로 ‘낙관적’ ‘희망적’ ‘긍정적’이란 표현을 16차례 사용하며 “우리가 기후변화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고어샛과 제2의 블루 마블, 파리협약이 2015년에 나란히 성사된 것은 그저 우연이었을까. 신념을 가진 정치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것일지 모른다.
태원준 사회부장 wjtae@kmib.co.kr
[태원준 칼럼] 앨 고어의 블루 마블
입력 2015-12-16 1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