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의 꽃씨 칼럼] 천리마에겐 천리를 뛰게 하라

입력 2015-12-15 17:31

나는 이어령 교수를 만날 때마다 그분의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언변에 탄복을 한다. 그의 사상적 내공을 검술로 비유하면 무림의 최고 고수이다.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박학다식한 지식과 정보, 시대와 인간 내면을 꿰뚫어보는 섬광 같은 통찰력, 천의무봉의 필력은 감히 올려다볼 수 없을 정도로 지존의 경지에 올라 있다. 그분의 이야기는 한마디 한마디가 촌철살인이요, 잠든 사색의 웅덩이에 파문을 던지는 혜안의 언어다.

이어령 교수가 누구인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비롯해 ‘신한국인’ ‘디지로그’ ‘젊음의 탄생’ ‘생명이 자본이다’ 등 한 세대를 앞서보며 시대지성을 이끄는 주옥같은 명작들을 남긴 사상가가 아닌가. 그런데 최근에 그분이 “우리 사회는 1등을 죽이는 사회”라고 갈파하며 또 한 번 우리의 시대정신을 환기시켰다. “한국 사회는 천리마에게 천리를 뛰게 하기는커녕, 천리마에게 짐을 지우고 그 무게에 짓눌려 죽게 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그래서 “1등이 될 때까지는 띄우지만, 1등을 죽이는 사회”라고 했다.

그는 우리 사회를 롤러코스터에 비유한다. 올라갈 때까지는 신나게 띄운다. 그런데 정상에 오르기만 하면 바로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후배들에게도 1등을 하지 말고 항상 2등을 하라고 조언하며 산봉우리가 보이면 올라가지 말고 내려와서 다른 산봉우리를 올라가라고 한다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와 같은 천재도 만약 1등을 죽이는 한국 사회에서 태어났다면 벤처 기업하다가 망해서 사회복지기금이나 타 먹고 있을 것이라는 풍자를 하기도 했다.

그의 통찰은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단면을 비수처럼 찌른다. 우리 사회를 둘러보면 서양문화와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영국의 옥스퍼드나 미국의 스탠포드·예일·하버드는 모두 다 사람 이름이다. 우리는 전혀 그런 생각을 안 하지만 그들은 한 개인의 위대한 정신을 기념하고 계승하는 사회적 마인드가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사람 이름을 딴 대학이 있는가? 가령 이병철 대학이니 정주영 대학이니, 아니 어떤 정치인의 이름이나 대통령 이름을 기념한 대학도 나올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런 정신적 토대가 전혀 안 돼 있다. 우리 사회는 떴다하면 바로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1등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격려하며 기념하는 일들이 전혀 허용이 안 되는 사회다. 그러면 교계는 다른가. 교계는 더 심각하다. 한국교회에는 세계교회사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없는 위대한 부흥의 사도를 배출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지 그런 분을 흠집 내고 떨어뜨리려고 난리다. 작은 흠이 있다하더라도 사랑으로 덮어주며 지도자를 보호하려는 본성이 발동해야 하는데 말이다. 1등이 되면 무조건 달려들어 어떻게든지 죽이려고 하는 사회 속에서 무슨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고 역사적, 영적 저력이 나오겠는가.

나도 한때는 1등을 끌어내리는 모습을 보며 은근히 마음속으로 박수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력하나마 1등을 치켜세우고 동경하며 예찬하면서 1등인 그가 더 큰 영향력의 지경을 넓히는데 조력자가 되기를 원한다. 부디 한국교회가 1등을 진심으로 존중하며 세우는 문화가 정착됐으면 좋겠다. 1등이 진정한 지도력을 행사하고 그의 리더십이 편만하게 될 때, 한국교회가 능히 시대의 정신과 사상을 이끌어갈 수 있다.

1등 외에도 한국교회에 얼마나 천리마가 많았는가. 그런데 천리마를 더 잘 뛸 수 있도록 격려하고 응원하기는커녕 어떻게든 짐을 지우고 고통을 안겨 넘어뜨리게 하지 않았는가. 천리마에겐 천리를 뛰게 해야 한다. 아니, 더 빠르고 더 멀리 뛰어갈 수 있도록 격려하며 힘을 모아 주어야 한다. 그럴 때 한국교회가 침체와 쇠퇴를 벗어나 다시 부흥의 대지 위를 달려갈 수 있다. 1등을 죽이는 사회가 아닌, 1등을 더 높여주는 사회, 그리고 천리마를 천리 이상 뛰게 하는 사회적 의식 변화가 시급한 때이다.

소강석(새에덴교회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