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박용천] 어메이징 그레이스

입력 2015-12-15 18:04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총기난사 사건으로 비통에 잠긴 흑인교회에서 추도 연설을 하던 중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노래를 불러 모든 미국인의 심금을 울리고 슬픔을 달래주었다고 한다. 들어보니 썩 잘 부른 노래는 아닌데 명연설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하니 영향력이 컸던 모양이다.

필자는 중·고등학교 시절 존 바이즈가 부른 ‘어메이징 그레이스’나 글렌 캠벌이 부른 ‘오! 해피데이’, 엘비스 프레슬리가 부른 ‘How great thou art’라는 노래들이 종교적인 곡인 줄 모르고 그저 노래가 좋아 따라 부르곤 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노래가 찬송가에 있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한국말 가사는 원곡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우리말 가사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라고 시작한다.

원래 이 곡의 가사는 흑인 노예무역을 하던 존 뉴턴이라는 사람이 썼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이 가사의 의미를 잘 몰랐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자기가 죄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필자는 대학생 때 장발 단속에 걸려 파출소에 한번 끌려간 적밖에 없고, 범죄와는 거리가 멀어 죄인이라는 말은 나와 관계없는 단어라고 생각하며 살아 왔었다.

그러면서 정신과 전문의가 된 후 좀 더 훌륭한 정신과 의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갖고 교육분석이라는 것을 받게 되었다. 교육분석이라는 것은 정신분석가가 되기 위한 조건 중 하나로 정신과 의사 자신이 정신분석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 말에는 ‘나는 정신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고 교육 목적으로 분석을 받는 것’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해 고전적 정신분석은 아니고, 그와 같은 맥락의 보다 실용적인 정신분석적 정신치료였다. 더 중요한 사실은 좋은 정신치료자가 되기 위해 받았던 교육분석이 실은 나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치료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교육분석을 받았다고 하지 않고 정신치료를 받았다는 말을 사용한다.

이런 정신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나의 무의식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원래 무의식이란 내가 의식하기 불편한 것들을 의식하지 못하게 밑으로 눌러 놓았었기 때문에 평소에는 전혀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치료자의 도움을 받아가며 나의 무의식을 탐색했을 때 내가 사형당해 마땅한 흉악범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고통보다는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이러한 흉악범을 아직까지 살아있게 해준 게 누구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왜 살려두는지, 앞으로 나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저절로 깨닫게 되었다.

몇 년 전 ‘울지 마 톤즈’라는 고 이태석 신부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는데 말미에 거리 인터뷰 장면이 잠깐 나왔다. 기자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라고 길거리 질문치고는 어려운 질문을 하였는데 한 학생이 잠깐 생각하더니 “사랑인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던 장면이었다. 그 학생은 이 신부에 대해 모르는 상태에서 대답한 것 같았는데 다큐멘터리의 내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아직도 기억이 난다. 쌀자루는 어디를 찔러도 쌀이 나오고 보릿자루는 어디를 찔러도 보리가 나오듯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사랑이 늘 존재하는 것 같다.

나이를 먹은 이제야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우리말 가사가 가슴에 와 닿는다. 나 같은 죄인을 왜 살리셨나? 사랑을 하라는 얘기다. 그걸 몸소 실천하기 위해 세상에 온 이가 태어난 날이 크리스마스다. 저물어가는 2015년을 정리하며 다시 한번 불러본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박용천 한양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