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의류수거함

입력 2015-12-15 04:00

서울 강북에 사는 주부 장모(56·여)씨는 최근 가을옷을 추려 집 주변 의류수거함에 넣었다. 불우이웃도 돕고 재활용도 하자는 생각에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렇게 한다. 그는 14일 “아까운 마음에 조금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라면서도 “잘 안 입는 옷을 장롱에 걸어두는 것보다 정말 필요한 사람과 나눌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겨울철 자선냄비에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듯 누군가는 의류수거함에 옷을 넣는다. 수거함을 운영하는 단체에서 좋은 곳에 쓸 거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진 않다. 일부 의류수거함은 ‘업자’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돈이 되다보니 너나할 것 없이 의류수거함을 설치해 주택가 골목은 몸살을 앓고 있다.



이웃돕기? 돈벌이?

김모(66)씨에게 의류수거함은 ‘밥줄’이다. 서울 강북 일대에 100개가 넘는 의류수거함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그의 수거함에는 각종 장애인단체 명칭이 새겨져 있지만, 수거함에 모인 의류는 고스란히 김씨의 것이 된다.

김씨는 고물상을 하면서 의류수거함이 돈벌이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2009년 한 장애인단체와 의류수거함 위탁계약을 맺었다. 장애인단체는 명의를 빌려주고, 김씨가 의류수거함 제작과 운영을 도맡았다. 수익은 반씩 나누기로 했다. 그는 다른 업자가 설치한 의류수거함을 인수해 운영하기도 했다.

수집한 의류를 분류해 돈이 될 만한 옷은 중고의류 수출업자에게 팔고, 나머지는 의류수거업체에 ㎏당 400원 정도를 받고 넘긴다. 이런 식으로 웬만한 직장인 월급을 웃도는 돈을 벌고 있다.

지난해 위탁계약이 끝났지만 김씨는 의류수거함을 포기할 수 없었다. 장애인단체 이름이 박힌 수거함을 그대로 운영하고 있다. 그는 “장애인단체 명의를 빌려 개인이 설치한 의류수거함이 한두 개가 아니다”며 “어찌됐든 수집한 의류를 재활용하고 있으니 좋은 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 이어 “수거함을 열어보면 반쯤은 쓰레기나 재활용 못하는 솜이불인데 이걸 처리하는 것도 내 몫”이라고 덧붙였다.

김씨에게 명의를 빌려줬던 한 장애인단체 관계자는 “의류수거함을 제작하려면 돈이 한두 푼 드는 게 아니다. 수거함의 의류를 운반하는 것도 차량과 일손이 필요하다”며 “작은 단체 입장에선 그럴 여력이 없어 개인업자에게 명의를 빌려주고 수익을 나누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김씨가 수거함을 제작했기 때문에 수거함에서 단체 이름을 지워 달라고 요구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했다.



‘골칫거리’ 의류수거함

의류수거함은 1990년대 후반 자원을 재활용하고 불우이웃을 돕자는 취지로 주택가 곳곳에 들어섰다. 도로에 설치될 경우 도로법 38조의 ‘허가받지 않은 시설물’에 해당하지만, 지방자치단체들은 장애인단체와 보훈단체 등을 고려해 관행적으로 눈감아줬다.

장애인단체는 의류수거함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운영비를 자급하고, 일부는 불우이웃돕기에 썼다. 구청 재활용센터는 일감을 덜고, 의류가 다른 재활용품과 섞이는 것도 막을 수 있었다. 의류수거함에 헌옷을 넣는 사람들은 ‘작은 기부’의 기쁨을 맛봤다.

그러나 금세 거리의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디자인·색상·크기가 제각각인 데다 온갖 전단이 덕지덕지 붙어 골목길의 흉물이 되고 있다. 전봇대 주변과 더불어 쓰레기 무단투기장으로 변하기도 한다. 악취를 호소하는 민원도 이어지고 있다.

돈이 되다보니 장애인단체, 보훈단체 외에 여러 개인업자가 난립하면서 이런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얼마나 많은 수거함이 설치돼 있는지 파악조차 힘들다. 서울시에 설치된 의류수거함은 1만3000여개로 추산된다.

서울시는 2012년 11월 ‘의류수거함 정비추진계획’을 발표해 정비하고 있다. 각 구에서 수거함 규격을 통일하거나 위탁운영 단체를 선정하고 있지만 갈 길이 멀다. 철거를 요청하거나 악취를 호소하는 민원은 여전하다.

신훈 기자 zorb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