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에서 학업을 계속하기는 쉽지 않았다. 사실상 나는 고아나 다름없었다. 내가 자신할 수 있는 건 체력밖에 없었다. 경기도 화성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매일 8㎞를 걸어서 통학하며 기른 체력이 유일한 자산이었다. 경기도 수원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나는 학교 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벌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이면 언제나 매점으로 달려와 장사를 했다. 수업이 끝난 뒤 매점을 정리하는 일 역시 나의 몫이었다.
당시 내가 머물던 삼일고아원에서도 편하게 쉴 수만은 없었다.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어서 고아원에는 전쟁고아들이 많았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관리했다. 낮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는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고교 시절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꼽으라면 웅변과 관련된 일들을 들 수 있다. 나는 일찍부터 웅변에 소질이 있었다. 수원에서 웅변을 제일 잘하는 학생으로 소문이 나면서 전국 고교생들이 겨루는 웅변대회에 출전한 적도 있다. 특히 고등학교 2학년 때 수원시 주최로 열린 전국고교생웅변대회에 참가한 일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대회는 수원극장에서 열렸다. ‘반드시 1등을 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런데 갑자기 토요일에 열리기로 예정돼 있던 대회가 일요일 오전 10시로 하루 연기되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학교 대표, 나아가 ‘수원 대표’였기에 대회에 꼭 참가해야 했다.
하지만 주일에 교회를 빠질 수는 없었다. 중학생 시절 세례를 받을 때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화성 비봉감리교회 조피득 목사님은 세례를 집전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은 꼭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다.
고민 끝에 나는 주일을 못 지키게 되었으니 주일에 새벽예배라도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날 새벽 출석하던 영화교회로 향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병설 목사님이 담임목사님이셨다. 나의 사정을 들은 목사님은 정색하셨다. “앞으로 목사가 될 사람이 주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주일을 못 지키는 일 때문에 고민하던 중에 목사님이 강하게 해주신 이 말씀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학교에서 어떤 처벌을 받더라도 웅변대회에 나가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결국 주일에 나는 대회장에 가지 않았다. 교회에서 봉사하며 하루를 보냈다.
월요일에 학교에 가니 난리가 났다. 한 교사는 교직원회의에서 이런 말까지 했다고 한다. “김진호 학생은 학교의 명예를 떨어뜨렸다. 정학시켜야 한다.” 다행히 교장 선생님의 배려로 정학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가 미션스쿨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교장 선생님은 나를 불러 왜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는지 물었고 나는 주일성수 때문이었노라고 답했다. 교장 선생님은 내 사정을 듣더니 “믿음의 학교에서 주일에 교회 나가기 위해 다른 일을 포기했다면 이 학생에겐 벌을 줄 게 아니라 오히려 포상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사건은 학교에서 큰 화제가 됐다. 내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고교 시절에 기른 웅변 실력은 훗날 목회자가 돼 설교를 할 때 큰 도움이 됐다. 하나님이 나를 목사로 키우기 위해 그 시절부터 나를 훈련시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중학교 시절 목회자가 되겠다는 꿈은 막연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고교 시절 나는 목회자가 반드시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목회자가 되는 게 나의 사명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진호 <3> 주일성수 하느라 전국웅변대회 불참해 정학 위기
입력 2015-12-15 1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