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성 의료 선교사, 애니 엘러스] 을미사변 후 독살 걱정하는 고종 위해 음식 만들어

입력 2015-12-14 18:38
윤치호가 펴낸 찬미가 제1장. 독립문 정초식에는 윤치호가 쓴 가사에 번커가 곡을 붙인 애국가가 불렸다.
한성감옥서 도서대출부 도서목록. 당시 대한성서공회와 대한기독교서회는 수감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경과 각종 신앙서적을 제공했다. 이용민 박사 제공
애니 엘러스와 번커는 내한 선교사들 가운데 조선 땅에 끝까지 남아 자리를 지킨 최초의 선교사다. 또한 선교사로서 가장 공적인 영역에서 활동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애니 엘러스와 번커 부부의 조선 사랑’이란 주제로 이들의 선교활동 몇 가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의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사업

애니 엘러스와 번커 부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역 중 하나는 조선의 젊은이를 위한 교육사업이었다. 이들은 선교 초반부터 교육사업에 열성을 보였다. 엘러스는 의료 활동을 하는 동시에 젊은 여성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고, 번커는 조선의 양반 자제들을 위한 육영공원을 책임지고자 끝까지 애썼다. 엘러스는 정동여학당을 하이든에게 인계한 뒤에도 계속 관계를 맺었으며 이화학당에서는 재봉과 자수 등을 가르쳤다. 또 새로 생긴 간호학교에서는 의학 관련 과목들을 가르쳤다. 특히 엘러스는 선교 초기부터 성경공부반을 개설해 젊은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신앙교육에도 힘썼다.

육영공원의 폐쇄로 배재학당으로 가게 된 번커는 당국과 협의해 배재학당에서 조선인 관리들을 교육하는 방식으로 육영공원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는 배재학당이 감리회 소속 학교에 머물지 않고 조선의 젊은이들을 위한 대표적인 학교로 발전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905년 이후 번커는 배재학당을 연합학교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1911년부터 경신학교의 언더우드와 배재학당의 번커를 중심으로 한 대학부의 통합으로 이어졌고, 훗날 연희전문학교가 탄생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 번커는 초교파 학교로 설립된 피어선성서학원 교수진으로 참여해 평신도를 지도하는 일에도 힘썼다. 번커 부부는 은퇴를 앞두고 그동안 자신들이 소장한 책들을 에비슨에게 기증했는데 이 책들은 1932년 5월 연희전문학교 도서관이 확장됐을 때 에비슨 문고로 등록됐다.



조선의 왕비와 왕을 위한 활동

엘러스는 약 8년 동안 명성황후의 시의 역할을 맡았다. 번커가 육영공원을 나온 뒤 엘러스와 함께 유럽과 아시아를 여행했던 시기를 제외하면 줄곧 조선의 황후를 돌보았던 셈이다. 1895년 10월 8일의 을미사변이 나기 2주전인 9월 25일 명성황후를 본 것이 그의 마지막 알현이었다. 엘러스는 사변 후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하며 황후의 빈전을 지켰으며 홀튼과 함께 국장에도 참례하였다. 이 사건은 평생 그녀의 기억에 남아 조선을 향한 긍정적 트라우마로 작용했다.

을미사변 직후 고종은 심각한 불안에 시달렸다. 그 역시 언제 시해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고종의 두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선교사들이 나섰다. 번커를 포함한 선교사들은 불침번을 서며 고종의 침소를 지켰다. 애니 엘러스는 독살의 위협 때문에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못하던 조선의 왕을 위해 홀튼과 함께 직접 음식을 만들었다.

선교사들은 불안에 떠는 고종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고자 했다. 11월 28일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이어하려고 했던 이른바 ‘춘생문 사건’은 실패로 끝났지만 선교사들이 왕을 보호하고자 노력한다는 진심은 조선 사람들에게 전달됐다.

1896년 11월 21일 5000여명의 인파가 모인 독립문 정초식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은 애국가를 크게 불렀다. 이 날 불린 애국가는 모두 네 가지로 윤치호가 쓴 것이었다.

“우리황상폐하 천지일월같이 만수무강 산높고물고은 우리대한제국 하나님도우사 독립부강 길고긴왕업은 용흥강푸른물 쉬지않듯 금강천만봉에 날빛찬란함은 태극기영광이 비치는 듯 비단같은강산 봄꽃가을달도 곱거니와 오곡풍등하고 금옥구비하니 아세아낙토가 이아닌가 이천만동포는 한맘한뜻으로 직분하세 사욕은 버리고 충의만앞세워 님군과나라를 보답하세.” 이 가사에 곡을 붙인 사람은 다름 아닌 번커였다.



옥중 전도 이야기

번커는 한성감옥서에서 전도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낼 때까지 끈질기게 관련 당국을 설득했다. 그곳에 자신의 제자들이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보다 넒은 차원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인권선교를 하기 위함이었다. 1902년 12월 28일, 성탄을 기념해 감옥에서 최초로 예배가 드려졌다. 이보다 전부터 감옥서에는 수감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무료 도서실이 개방돼 있었다. 대한성서공회와 대한기독교서회는 이곳에 성경을 비롯한 각종 신앙서적을 공급했다.

현재 한성감옥서 도서실 도서대출부가 남아있어 누가 언제 무엇을 빌려 읽었는지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옥중에서 개종하기도 했으며 출감 이후 대거 교회로 들어와 한국 기독교 역사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약했다. 수감자 이승만 신흥우 등은 배재학당 출신이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감옥서 내에 학교가 만들어졌다. 이 학교에서는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한글과 성경 등을 가르쳤다. 이는 젊은 애국지사들에게 기독교의 영향을 불어넣은 계기가 되었다. 이상재 이원긍 유성준 이동녕 이준 홍재기 등이 감옥 내 학교의 수강생들이다.

엘러스는 남편을 따라 수감된 여죄수를 대상으로 옥중전도를 했다. 엘러스는 이들에게 성경을 읽어주면서 예수의 사랑에 대해 전했다. 추수감사절에는 음식 반입이 허락되어 수감자들과 함께 먹기도 하고 기도도 드렸다. 수감자들은 매주 찾아오는 엘러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예수를 믿겠다고 결심한 사람들도 있었다. 애니 엘러스와 번커의 조선 사랑을 잘 보여주는 사역은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가장 낮은 곳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펼쳐졌다.

이용민 박사(한국기독교역사학회 연구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