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진호 <2> “장손, 예수쟁이 안된다” 할아버지 회초리로 혼내

입력 2015-12-14 18:13 수정 2015-12-14 18:14
김진호 목사(앞줄 가운데)와 고교시절 교회 친구들이 10여년 전 김 목사의 서울 도봉구 자택에서 찍은 기념사진.

경기도 화성 비봉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며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다. 특히 교회학교에서 우리를 가르친 최귀윤 선생님은 내 신앙생활의 은인과도 같은 분이다. 그는 나를 친동생처럼 여겼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하나님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비행 청소년으로 사춘기를 보내다가 결국엔 비뚤어진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최 선생님은 나를 따뜻한 미소로 대해주셨다. 교회에서 성극을 올리거나 찬양대를 꾸릴 때면 언제나 나를 행사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곁을 떠나 조부모 밑에서 살던 내게 최 선생님은 부모나 다름없었다. 이런 경험이 있기에 나는 지금도 교회학교 교사들의 막중한 책임을 자주 생각하곤 한다. 이들로 인해 철부지 어린이들도 신앙인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절 나의 신앙생활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매사에 엄격했던 할아버지는 내가 교회에 나가는 걸 강하게 반대했다. 할아버지는 회초리로 손자의 종아리를 때렸다. 하나뿐인 집안의 장손이 ‘예수쟁이’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조상에게 죄를 짓는 거라고 여기셨던 것 같다.

나는 할아버지가 종아리를 때릴 때면 “다시는 교회에 안 가겠다”면서 손이 닳도록 싹싹 빌었다. 하지만 주일만 되면 교회가 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복음의 심오한 내용을 이해한 것도 아니고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닌데도 교회가 가고 싶었다. 주일이면 할아버지 몰래 집을 빠져 나와 교회로 향했다.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지 3개월쯤 지났을까. 할아버지도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 시절 나는 왜 그렇게 교회에 나가는 걸 좋아했을까. 돌이켜보면 교회는 내가 유일하게 따뜻함을 느끼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내가 ‘주인공’이 되는 장소였다. 성탄절에 성극을 무대에 올릴 때면 나는 비중 있는 역할을 맡곤 했다. 자존감이 무엇인지 처음 실감한 시간이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비봉감리교회 조피득 목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조 목사님은 “김군은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일생동안 주일 성수만 잘해도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다. 주일에는 꼭 교회에 와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나는 주일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6·25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고모들이 모시기로 했다. 나로서는 살 곳이 없어진 셈이다. 동생들을 데리고 대전에 살던 어머니에게 갈 수는 없었다. 어머니 역시 경제적으로 너무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방학 때나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고민 끝에 전쟁이 발발하기 전 할아버지와 살았던 경기도 수원으로 향했다. 수원에서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숙식은 전쟁고아들로 바글대던 삼일고아원에서 해결했다.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학업을 병행하는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전쟁이 터지기 전 나는 평범한 초등학생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전쟁을 겪은 뒤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면서 나는 조숙한 청소년이 됐다. 돌이켜보면 그런 시련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남들보다 조금은 빨리 성숙하게 만드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수원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신앙생활은 계속했다. 수원에서 출석한 교회는 이병설 목사님이 목회를 하시던 영화교회였다. 교회는 사실상 나의 집이었다. 그곳에서 좋은 친구를 많이 만났다. 교회에 있을 때만큼은 혼자가 아니었다. 외롭지 않았다. 신앙적으로도 성숙해진 시기였다. 목회자가 돼야겠다는 꿈을 처음 품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부터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