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도(원무곡)’는 의미심장하다. 김환기(1913∼1974)는 서양 음악을 제목으로 한 추상화 작품을 1935년 일본 니혼대학 졸업작품전에 냈다. 경쾌한 원색과 리드미컬한 면 분할, 화면 가득 흐르는 음악과 소리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작품 세계를 읽는 키워드가 될 수 있다.
김환기는 ‘달과 항아리, 매화가지’의 이미지로 기억된다. 크리스티 홍콩이 지난달 말 실시한 하반기 경매 이브닝세일에서 1번으로 깜짝 내세운 그의 작품이 그렇다. 푸른 달을 배경으로 학 두 마리가 날아가는 그림. 1950년대까지 우리 것을 그려야 한다는 자각으로 그런 소재를 택했다.
작품 세계에 전기가 왔다.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커미셔너로 참가한 뒤 귀국하지 않고 뉴욕에 정착했다. 1974년 이국땅에서 눈을 감기까지 11년간의 뉴욕 시기, 그는 다시 음악적 추상의 세계로 돌아간 듯 하다. 한국이라는 거대한 중력을 벗어나니 비로소 청년시절의 원초적 본능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서울 종로구 현대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김환기의 선·면·점’전에는 음악이 흐른다. 경쾌한 소나타에서 깊고 풍성한 교향곡, 옷깃을 여미게 하는 장송곡까지. 작품 스케일이 커 성능 좋은 앰프에서 나오는 음악 같다. 전시는 그가 뉴욕 시절에 그린 22점을 선보인다. 만년을 대표하는 점화(點畵) 추상이 가장 화제다.
전시는 점화가 나오기 전의 1963∼1969년 작품, 1970∼1973년 점화의 시기, 세상을 떠나던 1974년의 점화로 크게 구성돼 있다. 점화가 나오기 전까지의 작품 제목을 보면 메아리, 아침의 메아리, 봄의 소리 등 음향을 느끼게 하는 제목이 유독 많다. 이미 1960년 ‘밤의 소야곡’이라는 추상작품으로 자신이 어디에 끌리는지를 넌지시 알렸던 화가였다. 파란 네모 위에 콕 찍은 붉은 점이 점점이 이어지는 화면은 리드미컬하다. 쌓아올린 둥근 원은 음악에 맞춰 빙그르르 원무를 추는 듯하다.
이어지는 점화 시리즈는 무제. 완성된 날짜가 병기되어있을 뿐이다. 통상 점화 추상은 고국의 그리운 얼굴들을 한 점 한 점 찍어나간 노스탤지어로 해석이 된다. 지중해 바다를 연상시키는 코발트블루의 점들은 점점 짙어져 청회색의 점으로 바뀌어 간다. 이역에서는 점점 깊어지는 향수병이 그런 색의 변화로 표현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역시 또 다른 음악이다. 점들은 하나하나 음표가 되어 마치 천장이 아득히 높은 대성당에서 퍼져나가는 깊고도 풍부한 파이프오르간 음악 같다.
1974년 7월 25일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7월 5일 병원에 입원하기 한 달여 전에도 3점의 점화를 완성했다. 그러나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하며 기운이 딸렸을 것이다. 두 다리를 버티고 서서 그렸던 거대한 캔버스는 약해진 몸을 의자에 앉히고 그려도 될 크기로 작아졌다. 한 때는 강렬한 오렌지 빛으로 생을 노래했던 캔버스는 타고 남은 잿빛으로 바뀌었다. 여전히 점들을 찍어나갔지만 윤곽은 흐리해졌다. 스스로에게 바치는 장송곡처럼. 내년 1월 10일까지. 일반 5000원, 학생 2000원(02-2287-3527).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김환기의 선·면·점’ 展… 점점이 찍힌 선율, 캔버스 타고 흐르는 ‘음악 추상’
입력 2015-12-13 1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