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진호 <1> 가족 잃은 아픔 보듬어주라는 말씀에 순종 6년째

입력 2015-12-13 18:19
김진호 목회자유가족돕기운동본부 대표가 13일 서울 종로구 운동본부 사무실에서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들려주고 있다. 전호광 인턴기자

언젠가부터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를 꼽으라면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할 때’를 들곤 한다. 멜로디도 좋지만 노랫말이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다.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할 때/ 주가 위로해 주시리라/ 아침 해같이 빛나는 마음으로/ 너 십자가 지고 가라….’

나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 대부분이 그러하듯 나 역시 쉽지 않은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 찬송가 가사처럼 ‘마음에 슬픔이 가득할 때’가 많았다. 슬픔과 절망의 시간은 수시로 찾아왔다.

나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며 유년기를 보냈다. 청소년기에는 고아원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대학생이 돼서도 삶은 팍팍했다. 고학(苦學)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남들처럼 안정된 삶을 살기 시작한 건 목회자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수많은 교회를 부흥시키는 데 성공했고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감리교단 최고 지도자인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목회자가 된 뒤 시련이 없었던 건 아니다.

특히 5년 전, 당시 30대 중반이던 막내아들이 뇌가 세균에 감염되는 질병인 뇌농양으로 세상을 떠난 일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아픔이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참척(慘慽)의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래 고민했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아, 가족을 잃은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을 보듬으라는 하나님의 메시지구나.’

나는 목회자유가족돕기운동본부를 만들어 2010년부터 홀사모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많지 않은 액수지만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에게 격려와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다.

국민일보로부터 ‘역경의 열매’ 시리즈를 연재해 달라는 제안을 받고 잠시 망설였다. 나의 인생역정을 소개하는 일이 독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평생을 산 한 목회자의 인생 스토리라고만 여겨주셨으면 좋겠다.

우선 나의 출생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회사원인 평범한 가정의 장남이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가족 중 아무도 없었다. 평탄했던 유년기 삶이 뒤틀리기 시작한 건 1949년, 아버지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부터다. 당시 나의 나이는 열 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경기도 수원에서 한의원을 하던 할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왔다. 가문을 이을 장손이니 조부모인 당신들이 직접 나를 키워야겠다는 전갈이었다.

결국 나는 어머니 품을 떠나 수원으로 갔다. 그리고 1년 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나는 조부모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고모들이 살던 경기도 화성으로 갔다. 화성에 있는 야목중학교에 진학했다. 그 시절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했듯 나 역시 엄청난 고생을 했다. 무엇보다 배가 너무 고팠다.

전쟁이 한창이던 52년, 성탄절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친구들로부터 마을에 있는 비봉감리교회에 가면 떡을 준다는 말을 들었다. 음식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시기였기에 곧바로 교회에 달려갔다.

떡을 먹는 것도 좋았지만 나의 마음을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만든 건 교회 성도들의 환대였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품을 떠나 조부모 밑에서 자라던 나는 사랑에 굶주린 소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따뜻하게 환영해주는 성도들의 모습은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교회에 출석하며 ‘세상에 이렇게 좋은 곳이 있나’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나의 신앙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하나님을 만난 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약력 △1939년 서울 출생 △감리교신학대 졸업 △목원대 신학대학원 졸업 △도봉감리교회 원로목사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목회자유가족돕기운동본부 대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