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일이면 강림절 제3주일이다. 평소에 예수님을 묵상하는 데에 등한했던 사람이라도 이 기간에 좀 더 예수님에 대해 생각해보면 좋겠다. 시점이 시점인지라 아기 예수를 생각하게 되지만 최근의 경험을 살려 십자가의 예수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최근 피아노 공연을 갔는데 작은 공간에서 있던 공연이라 피아노 바로 앞에 앉아서 연주를 들을 기회를 가졌다. 막상 그렇게 공연장에 있어보니 좀 난처한 느낌이었다. 일반적으로 나는 앞자리를 선호하지 않는다. 두 가지 느낌을 가졌는데, 첫째는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이 왜 그렇게 맨 앞자리를 선호했는지 깨달은 것이다. 오로지 앞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이니까 그런 것이다. 둘째는 나는 맨 앞자리에 있으면 뒤가 신경 쓰인다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은 날 신경 쓰지 않겠지만 내가 산만해서인지 자의식 문제인지 내가 보지 못하는 뒤에 있는 사람이 신경 쓰이는 것이다.
동시에 연주자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자리에서 뒤통수도 아니고 관념적으로도 아닌 정말 참여자 모두가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어떻게 연주에 집중할 수 있는지가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개는 자기애적 요소가 있어야 뻔뻔하게 그런 상황에 자연스럽게 놓일 수 있고 오히려 그런 자리를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연극배우들 중에는 낯가림이 심하고 사회공포증을 겪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무대에서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래도 무대와 객석이 멀거나 무대조명으로 객석이 보이지도 않는 그러한 공간 구분이 안 되는 소극장에서의 공연은 좀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순간 깨달음처럼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바로 벌거벗음이다. 내가 상담을 수년간 배워오고 실제로 진행하면서 이론적으로는 이해해왔던 개념이 좀 더 체감되는 기분이었다. 연주자나 배우는 단순히 남들이 자기를 주목할 때 희열을 느끼는 자기애적 요소로만 그 자리에 놓여 있는 게 아니라, 벌거벗은 그 자체를 그대로 허용할 수 있는 자세를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발견을 하였다. 나는 누드모델처럼 사람들 앞에 놓여서 누가 나의 세밀한 부분을 냉정히 관찰하려는 것을 허용할 수 있을까? 이 부분에서 내가 먼저 극복을 하고 남들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면 불안에 대한 좋은 해결 도구를 가진 치료자가 될 것이다.
어린 아이가 벌거벗음을 창피하다고 여기는 것은 학습에 의해서이기도 하고 자연스러운 심리의 변화이기도 하다. 성서에서는 선악과를 먹은 후에 눈이 밝아져서 벌거벗음을 알았다고 하였는데(창3:7∼11) 어린이의 성장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즉 우리 한 사람의 일생은 인류의 시작부터 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개인에게도 인류의 역사와 흡사한 중대한 시점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처럼, 타인의 벌거벗음을 보고 그것이 나의 벌거벗음과 동일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예수를 나체로 그린 성화는 거의 없지만 그것이 본질이다. 남들 다 벗고 있는 목욕탕에서의 옷 벗음이 아니다. 남들은 모두 자기를 철저히 포장하고 있는 한 가운데 홀로 ‘벗겨지는’ 그 상태를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다. 그 때에 나는 주님과 하나다.
최의헌 (연세로뎀정신과의원)
[최의헌의 성서 청진기] 벌거벗음
입력 2015-12-11 18:19 수정 2015-12-11 2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