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은신 25일째인 10일 조계사에서 나와 경찰에 체포됐다. ‘자진 출두’ 형식을 갖췄지만 퇴로가 단단히 봉쇄된 상황에서 끌려 나갈지, 걸어 나갈지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달 14일 1차 민중총궐기 집회로 촉발된 정부와 민주노총 간 대치국면은 지난 5일 2차 집회의 평화적 진행과 한 위원장의 자진 출두로 일단락됐다. 이 26일간의 상황은 ①폭력시위에 발목 잡힌 민주노총의 완패 ②강경진압 상황에서 법원과 조계종이 마련해준 우회로의 성공으로 요약된다.
얻은 것과 잃은 것
민주노총을 비롯한 진보진영 강경파는 폭력시위에 등 돌린 여론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들은 1차 집회에서 발생한 폭력으로 궁지에 몰렸다. 정부에 강경대응의 빌미를 제공하면서 민주노총 압수수색과 종교시설 진입 선례를 남겼다. 민주노총은 ‘폭력집단’이라는 오명까지 쓰며 타격을 받았다.
수배자인 한 위원장이 경찰과 숨바꼭질을 벌이듯 하는 모습은 정부를 도발하는 것으로 비쳐졌다. 그가 16일 밤 처음 조계사에 들어갔을 때 민주노총 측은 이 사실을 보란 듯이 페이스북으로 알렸다.
한 위원장의 ‘자진 출두’ 약속 번복은 어렵게 성사된 5일 평화집회 의미를 퇴색시켰다. 이슈 부각과 진지한 논의를 스스로 가로막은 장애로도 작용했다. 평화집회와 자진출두의 의미는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절하되기도 한다. 다만 사태 전개 과정에서 종교계와 중도·온건 시민사회의 참여가 이뤄지며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는 점은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정부는 ‘폭력시위’ 이슈를 전면에 내세우며 노동 관련법 개정, 역사 교과서 국정화 같은 이슈가 부각되는 것을 막았다. 복면금지법, 민주노총 압수수색, 집회 시위자에 대한 소요죄 적용 검토 등은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감히 밀어붙이기 어려운 것들이다. 정부는 한 위원장의 신병을 손에 넣었지만 경찰을 종교시설에 진입시키는 오점을 남겼다. 경찰은 한 위원장이 자진 퇴거할 기회를 줬지만 조계사 한복판까지 대규모 병력이 진입해 사찰은 몇 시간 동안 난장판이 됐었다.
제3자가 내준 우회로
한 위원장의 퇴거가 순수하게 자의에 의한 결정이라고 보긴 어렵다. 경찰이 9일 조계사에 들이닥쳐 체포 작전을 강행하자 한 위원장 역시 적잖은 부담을 느낀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이 대규모 병력으로 조계사 일대를 포위해 도망갈 길은 없었다. 버티다간 강제로 끌려나올 게 빤했다. 이 상황에서 한 위원장과 민주노총 집행부는 강제 연행과 자진 출두 중 어느 쪽이 유리할지 따져봤을 것으로 보인다.
한 위원장의 자진 출두는 조계종이 우회로를 마련해줬기에 가능했다. 조계종 측은 전날 “내일 정오까지 한 위원장 거취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약속으로 경찰의 체포 작전을 중단시켰다. 스스로 걸어 나갈 기회를 준 셈이다.
이런 양상은 지난 5일 2차 집회가 평화적으로 치러질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경찰이 집회를 금지한 상황에서 법원이 합법집회의 길을 열어주지 않았더라면 불법과 강경진압이 불가피했다. 한 위원장 출두와 평화집회 모두 정부의 고강도 압박→제3자의 조력→내부적 최종 결정의 수순을 밟은 것이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
폭력시위의 ‘끝’…한상균 ‘25일간 은신과 자진출두’가 남긴 것
입력 2015-12-10 21:51 수정 2015-12-13 14: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