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김병삼] 교만이 부른 不通

입력 2015-12-10 18:08

바벨탑의 상징은 ‘교만’이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인간의 교만은 바벨탑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에 대하여 하나님은 서로 소통할 수 없도록 언어를 혼란케 하셨고, 그 결과 바벨탑은 무너졌고 인간들은 각자 흩어져 버렸다. 소통의 부재는 교만의 산물이다. 인류가 살아오는 동안 지금처럼 발달된 소통의 수단을 가진 적이 없다. 눈부신 IT의 발전은 탁월한 SNS를 구축했다. 시간과 공간, 흩어진 언어조차도 소통의 장애가 될 수 없는 세상이 됐다.

인류 역사 가운데 지금처럼 ‘불통’을 이야기하던 때가 없는 것 같다. 포스트모던을 사는 우리가 불행한 것은 옳고 그름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탈권위’는 부정적 의미에서 모두가 잘났다는 교만의 자화상이 되어 버렸다. 고대의 무너졌던 하나의 바벨탑이 아니라 각자가 교만의 바벨탑을 쌓고 있다.

지금처럼 소통의 도구가 발달했던 적이 있는가? 그런데 왜 이 사회는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아우성인가? 지난 몇 주간 대한민국은 민노총의 시위로 야기된 ‘폭력’ 논쟁에 휘말렸다. 그리고 폭력을 막아야 한다는 이유로 ‘차벽금지법’과 ‘복면금지법’으로 맞섰다. 똑같이 폭력시위를 근절하자고 하지만 그 방법과 원인 규정에 있어서는 끝까지 평행선을 간다. 서로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소통하자고 하는데, 소통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10여년간 텔레비전에서 토론 프로그램의 사회를 맡았던 손석희씨가 대학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오랫동안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자신의 지지계층 등 특정 집단에만 통하는 이른바 ‘카타르시스 커뮤니케이션’이 우리 사회에 횡행하는 점을 느꼈다.” 소통을 위해 만나서 소통하지 못하는 이유다. 객관적이고 합리적 근거를 통해 설득하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박근혜정권 들어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소통의 부재’다. 흥미로운 것은, 소통을 위해 대통령과 만난 뒤 돌아서면서 하는 말이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통의 현상은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모인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프레임’이라는 책에 “우리는 항상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이 진실이고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썼다. 소통은 토론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프레임을 내려놓아야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소통은 ‘겸손’에서 시작된다. 소통은 상대방을 설득하는 노력보다 같은 가치와 방향을 향해 함께 달려가기 위해 자신을 내려놓으려는 마음이다. 추구하는 ‘선(善)’이 같고 가야 할 길이 ‘진리’라면,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에 대하여 ‘틀린 것은 아니다’라는 존중의 마음이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 중에도 하나님과 참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혹, 겸손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 뜻과 생각을 내려놓았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갈등을 겪고 있었던 빌립보 교회를 향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편지를 썼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은 ‘뜻이 같아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함께 갈 수 있다’는 의미다. 누군가가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사회는 비굴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지는 것이다. ‘소통’은 내 뜻이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갈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이다.

김병삼 만나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