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얘기했다. 봉사의 삶을 얘기했다. 어머니를 얘기했다. 그러더니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집무실로 가더니 교회 종을 꺼내 왔다. 묵직해 보였다.
“이 종(鐘)과 같습니다. 내 어머니는 내가 이삭과 같이 훌륭한 인품을 갖춘 지도자가 되라고 교회에 종을 헌물 하셨어요. 종 안쪽엔 제 이름을 새기셨지요. ‘김종구 김종구’ 이렇게 두 번을 쓰셨어요. 이삭의 어머니 사라가 하나님 약속을 듣고 얻은 아들 이삭을 두고 기뻐한 것만큼이나 우리 어머니도 제가 기쁨이셨습니다.”
㈔아시아사랑나눔(ACC) 김종구(61·여의도침례교회 안수집사) 총재를 8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사랑나눔 사무실에서 만났다. 1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아시아 아동·청소년을 돕기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 등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사랑나눔은 키르기스스탄 필리핀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등 저개발국 아동·청소년을 위한 교육 및 보건·의료 사업에 치중하는 국제NGO다.
리더 김 총재는 20대부터 영등포구 대림동 등 영등포 관내에서 포장산업으로 성공한 중견기업인. 그런 그가 2007년 NGO를 설립해 ‘사랑나눔’을 실천하게 된 것은 어머니 고 박순덕 권사의 기도 때문이다. 모태신앙이었던 그는 가만히 앉아 공부하기보다 산과 들을 헤집고 다니는 것이 더 즐거운 ‘악동’이었다. 고향 교회인 전북 정읍시 북면 구세군 신평영문교회가 놀이터였고 배움터였으나 그는 성장할수록 하루빨리 고향을 떠나 서울과 같은 큰물에서 성공하리라는 야망을 가졌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못내 걱정스러웠으나 다투지 않고 양보하는(창 26:17) 이삭과 같은 아들 성품을 보고 하나님께 맡겼다.
“팔남매나 되는 자식들을 오직 농사로 키우시면서도 한 번도 신세한탄 하신 적 없었어요. 신앙 안에서 모범을 보이셨죠. ‘너는 이삭처럼 큰 부자(창 26:12∼13)가 되어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도울 거야’ 하셨죠. 실제 어머니는 오일장에 나가 거지라도 만나면 집에 데려와 먹이고 입히고 차비까지 주어 보냈어요. 저는 그게 싫어 짜증을 내곤했지요.”
어린 아들을 위해 어머니가 헌물한 종은 그가 고향을 떠난 후 그 기능이 차임벨로 바뀌면서 없어지고 말았다. 그 사이 김 총재는 서울에서 동성수출포장, 대한신호 등 탄탄한 중견기업 대표로 큰 돈을 벌었다. 그는 사업한다며 한때 흔들렸던 신앙의 자세를 바로 잡고 고향 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교회에 음향기기를 기증하는 등 물질적으로 섬겼다. 그리고 종을 복원해 어머니의 신앙과 사랑을 추억했다.
“제 나이 스물다섯에 포장업체를 창업한 겁니다. 손바닥만한 공장서 먹고 자고 했어요. 요즘이야 정부가 나서 청년창업을 지원해주지만 그땐 어디 그래요. 우리 세대만 어렵게 자랐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자식 세대 힘든 거 다 알죠. 다만 부모와 이웃의 사랑을 받고 산다면 이겨내야지요. 실패하면 어떻습니까. 기도로, 사랑으로 격려하는 이들이 있잖아요.”
그는 30대 후반 서울시의원 등을 하며 정치로 세상의 변혁을 꿈꿨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기부와 봉사 같은 ‘사랑나눔’이 더 큰 덕임을 알았다. 이삭의 덕이었다. 그는 사업지 관내 다문화가정 독거노인 저소득층 및 차상위계층을 위한 물질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소녀 삔디 등 발달장애 어린이를 도와 국내에서 치료 받게 했을 때 그 아이들의 환한 미소가 어쩌면 나눔을 절대 끊을 수 없는 나의 힘이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시장터 아이들에게 그랬던 것처럼요.”
글·사진=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
“종소리 들으며 흔들리는 신앙 바로 잡았습니다”
입력 2015-12-09 20:51 수정 2015-12-09 2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