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에는 시인이자 철학자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자주 들렀던 카페가 있다. 괴테의 사진과 함께 그가 앉았던 의자, 탁자를 전시하고 있다. 카페 입구 표지판에는 괴테의 약력 등을 적었다. 프랑크푸르트의 괴테 생가는 관광코스로 유명하다. 세계 곳곳에는 예술가들이 머물렀던 공간을 문화명소로 보존하고 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의 자택이 베를린 시내에서 30㎞ 정도 떨어진 자크로우어 키르히베크 47번지에 있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자택은 1971년부터 1995년 그가 숨질 때까지 25년 동안 머물며 130여곡을 작곡한 음악의 산실이다. 얼마 전 찾아간 윤이상 자택에는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고 관리자도 없어 을씨년스러운 모습이었다.
앞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그가 조국을 그리워하며 한반도 모양으로 조성한 연못에는 낙엽이 가득하고 거실에는 빛바랜 화분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윤이상평화재단에서 자택을 인수해 음악회를 열기도 했으나 악보 등 유품은커녕 집안은 텅 비어 있었다. 창문과 베란다에는 먼지가 수북했다.
국제윤이상협회를 이끌고 있는 독일 첼리스트 볼프강 슈파러에게서 그간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슈파러는 동백림사건(1967) 희생자인 윤이상의 명예를 되찾아주기 위해 1998년 ‘윤이상명예회복청원서’를 들고 청와대를 방문했던 인물이다. 윤이상평화재단이 2007년 정부 지원까지 받아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으나 흐지부지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부인 이수자씨와 딸 윤정씨는 몇 년 전 윤이상의 고향인 경남 통영으로 거처를 옮겨가면서 자택은 돌보는 사람이 없게 됐다. 게다가 전기세, 수도요금, 가스비 등을 내지 못해 은행 차압이 들어오면서 자택이 경매에 넘어갈 지경에 이르렀다. 할 수 없이 자택을 매각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고 슈파러는 하소연했다.
윤이상의 삶이 분단의 경계 위에 있었던 것처럼 자택의 오른쪽은 옛 동베를린으로, 왼쪽은 서베를린으로 가는 길에 놓여 있다. 자택에서 왼쪽으로 200m쯤 걸어나가면 통영 앞바다 같은 반제 호수를 만날 수 있다. 작품을 구상하거나 악상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 조국이 그리워질 때면 이 호숫가를 거닐며 상념에 젖었을 것이다.
자택에서 7㎞ 남짓 떨어진 가토우 묘지의 특별묘역에 윤이상이 잠들어 있다. 검은 표지석에는 ‘처염상정(處染常淨·어느 곳에 있어도 물들지 않고 늘 깨끗하다)’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묘지 입구의 안내판에는 이곳에 묻힌 유명인사들을 기록했는데 윤이상의 이름이 유난히 고딕으로 뚜렷하게 쓰여 있다.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을 받은 그를 독일 정부가 최고의 예우를 한 것이다.
자택에 있던 ‘글리세-첼로 독주’(1970), ‘오보에 하프와 작은 오케스트라를 위한 이중협주곡’(1977), ‘신라’(1992) 등 친필 악보 3점과 거실 소파, 작곡 책상, 녹음 자료, 서신, 사진, 의류 등 각종 자료는 최근 통영으로 옮겨졌다. 통영시는 윤이상기념관을 지어 전시할 예정이다. 하지만 그의 열정과 숨결이 깃든 자택이 방치되고 있는 마당에 반쪽 기념관이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윤이상은 국제 음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거장이다. 음악 한류를 일찌감치 유럽에 전파한 그는 그러나 살아서는 간첩으로 몰리고 죽어서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상처 입은 용’이라는 별명이 붙은 윤이상의 자택을 세계적인 명소로 보존하는 방안은 정녕 없을까.
이광형 문화전문기자 ghlee@kmib.co.kr
[내일을 열며-이광형] 윤이상 자택을 어이할꼬
입력 2015-12-09 1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