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율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 0∼5세 보육은 국가가 책임지도록 하겠다.” “보육과 같은 전국 단위 사업은 중앙정부가 (재원을) 책임지는 게 맞다.” “아이 보육은 나라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고 낳기만 하라.”
3∼5세 누리과정과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대선 전후에 했던 말이다. 박 대통령의 공약집에는 ‘확실한 국가책임 보육/만 5세까지 국가 무상보육 및 무상유아교육’이란 내용도 있었다.
정부가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을 3000억원만 편성하자 박 대통령의 구두 공약이 다시 회자된다. 야권은 ‘코끼리 비스킷’이란 비아냥과 함께 ‘공약 포기’라고 몰아세우고 있다.
사실 누리과정에 대한 청와대 입장은 모호했다. 박 대통령 공약은 맞는데 예산은 지방자치단체와 지방교육청이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은 지난해 11월 “누리과정은 무상급식과 달리 법적으로 장치가 마련된 지자체와 지방교육청의 의무”라고 말했다. “중앙정부가 책임지겠다”는 말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이후 여권은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은 지방 책임’이란 지침을 따랐다. 내년 예산에서도 학교시설 환경개선비 명목으로 3000억원만 우회 배정했다.
시·도교육청들은 2조1000억원이 필요하다며 예산편성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어린이집 눈치를 봐야 하는 지자체와 시·도의회는 비상이 걸렸다. 제주도의회는 교사 임금을 깎아서 어린이집 예산을 마련하기로 했고, 대전시의회는 유치원 예산을 절반 잘라 어린이집 몫으로 돌려놨다. 이런 어이없는 일이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전국의 어린이집은 2014년 기준 4만3751개로 유치원의 배가 넘는다. 어린이집에 엄청난 표가 걸려 있으니 누리과정은 교육청이 파산하더라도 계속 굴러가게 생겼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애초부터 보수 진영은 무상복지와는 체질이 맞지 않았고, 박 대통령도 무상보육에 애착은 없었는지 모른다.
무상급식은 2006년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원희룡 후보가 공약으로 내걸긴 했지만 줄곧 진보 진영의 공약이었다. 2011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야권의 무상급식 공세에 맞서 ‘주민투표’ 승부수까지 던졌다가 사퇴했다. 이후 무상급식은 곳간이 거덜나든 말든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박 대통령도 어쩔 수 없이 무상보육 공약으로 맞불을 놓은 측면이 없지 않다. 당시 박 대통령은 셋째 자녀 대학 등록금 무료 공약까지 내걸었다. 무상 시리즈 흐름을 거스르면 당선이 어려울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작용했을 수 있다.
그러나 속내야 어떻든 박 대통령은 누리과정에 1인당 29만원씩 지원하는 정책을 약속했고, 중앙정부가 책임지겠다는 구두 보증까지 한 셈이다. 지금 와서 중앙정부 책임이 아니라는 건 약속 파기를 넘어 고의 부도로 오해받을 수 있다.
여권의 속내는 진보 진영이 거의 장악한 지방교육청에 “법적 근거도 없는 무상급식 비용을 누리과정에 투입하면 될 것 아니냐”는 것일 수 있다. 또 무상급식과 무상보육을 패키지로 놓고 “돈 때문에 더 이상 무상복지는 안 된다”고 대국민 포기 선언이라도 하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그랬다가는 엄청난 후폭풍이 두려워 아예 철저히 무시하는 전략을 쓰는 것 같다.
딱한 처지는 이해한다. 다만 전국 수십만명의 어린이들과 학부모들은 애가 타는데 계속 방치하는 건 너무 무책임하다. 오 전 시장은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제안하며 “망국적 포퓰리즘의 망령을 차단해야 한다”고 호소했었다. 차라리 그렇게 속 시원히 말이라도 하는 게 신뢰를 중시하는 ‘보수’의 태도 아닌가. 노석철 사회2부장 schroh@kmib.co.kr
[데스크시각-노석철] 부도난 천덕꾸러기 누리과정
입력 2015-12-09 1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