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에게 시는 훌륭한 방편이다. 좋아하는 시를 통해 곤란한 입장을 에둘러 표현할 수 있다. ‘감성의 정치인’이라는 포장효과까지 덤으로 얻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많은 정치인들이 애송시가 있다고 적극적으로 말하는 이유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이육사의 ‘청포도’와 홍사용의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좋아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상당수 정치인들은 윤동주의 ‘서시’를 애송한다고 밝혔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에 푹 빠졌다. 서청원 의원과 정몽준 전 의원도 이 시를 애송시로 꼽았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어릴 때 고향 구월산 밑 과수원집의 머슴할멈이 자주 읊조렸던 작자미상의 시 ‘왱왱찌꿍’을 아낀다고 말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당일 측근들과의 모임에서 함석헌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낭독했다. ‘만릿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는 구절마다 ‘전직’임을 재확인한 절절한 소회가 담겨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며칠 전 SNS에 올린 시가 잠시 화제가 됐다. 1991년 사고로 43세에 숨진 여성운동가이자 시인이었던 고정희의 83년 작 ‘상한 영혼을 위하여’였다. 언론은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디든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는 구절에 방점을 찍었다. 안철수 의원등 자신을 흔드는 세력에 대한 심경이 담겼다고 판단했다. ‘정면 돌파’ ‘최후통첩’ 등의 보도가 쏟아졌다. 그러나 다수의 평론가들은 그동안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라는 시구에 주목했다. 난관에 맞서는 한편으로 희망을 본다는 메시지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문 대표의 정치적 함의가 어떻든 상관없다. 모처럼 정치판에 나타난 한 편의 시, 청량하다.
정진영 논설위원 jyjung@kmib.co.kr
[한마당-정진영] 정치인과 시
입력 2015-12-08 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