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면 무조건 재미있었다.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어지간한 걱정거리나 복잡한 문제도 잊을 수 있었다. 간혹 마음에 흡족한 결과물이라도 나오면 그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나의 행복하고 달콤한 그림 그리기는 호기롭게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앞서 결혼한 선배들이 작업과 생활에서 곤란과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철석같던 나의 다짐은 얇은 유리처럼 깨져버렸다. 그 이후로 가족 부양과 내가 지향하는 작업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가 시작되었다. 어쨌든 나는 최근까지 최선을 다해 버텨왔다.
그림 그리기를 직업으로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처지라 나의 아이들은 그림 그리는 일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데 첫아이인 딸은 어려서부터 나의 작업실에서 뭔가를 긁적이고 그리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화창한 봄날, 딸은 예쁜 고등학생 교복을 입고 작은 눈으로 나에게 말했다. 앞으로는 그림만 그리겠다고. 그전부터 딸이 그림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나는 무관심한 척했다. 내가 모른 체하면 아이가 미술 아닌 다른 일을 선택할 거라고 믿었던 것일까. 아마 내가 겪어온 힘들었던 기억으로만 판단한다면 그림이 아닌 다른 일을 하는 게 지극히 정상이다.
하지만 딸은 이제 수험생이 되어 수능시험을 마치고 미술 전공학과 실기시험을 앞두고 있다. 어려서부터 시골에서 방목하듯 키워서인지 아니면 내 성격을 그대로 빼닮아서인지 매사에 느긋하고 여유를 부린다.
지난달 중국 베이징에서 전시가 있어 며칠 다녀왔다. 그곳 숙소에서 아침을 먹으려고 네댓 작가들이 원탁에 둘러앉아서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 평소 가까이 지내는 후배 여류 화가가 오래된 이야기를 꺼냈다. 자기는 참 재주가 없는 편이라서 남들보다는 훨씬 더 많은 노력을, 남모르게 해야 했다고 말했다. 대학 입시 때 자기가 지망한 곳에 낙방해서 시름에 잠겨 있는데 미술을 지도했던 선생님이 다가와 “너는 나중에 꼭 훌륭한 화가가 될 거야”라고 말씀해 주셨다고 한다. 선생님의 그 한마디는 좌절감에 빠져 있던 아이에게 한 줄기 빛이 되었고 꿈을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지금도 작업을 하면서 간혹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는 선생님의 그 금언(金言)이 생각나고 문제를 헤쳐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했다. 이어서 내가 대학 때부터 작업을 좋아하고 인품을 존경하던 선배가 특유의 어눌한 말투로 느리게 말했다. 누구든 뛰어난 재주와 순발력이 있으면 좋겠지만, 정작 그런 걸 다 갖춘 사람들의 경우 어떤 한 가지 일을 진득하게 해내지는 못하더라고 말했다. 재주는 부차적인 문제이고 뜨거운 가슴이 더 중요하며, 기술보다는 열성이 진정한 작품을 만드는 것 같다고 내가 말을 더했다.
생각해보니 나도 그렇게 재능이 뛰어나진 못했던 것 같다. 학창시절에는 무림의 절대고수처럼 기예가 발군인 동료들이 여럿 있었고 그들이 현란하게 움직이는 손끝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입시에서는 고배도 맛보았다. 그러면서도 미련하게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린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림은 ‘죽어라’ 하고 미련하게 그리기만 한다 해서, 혹은 재능이나 뛰어난 기술이 있다 해서 되는 것만은 아니다. 두 가지의 중간 지점 어디쯤에 해답이 있을 것 같지만 어딘지는 잘 모르겠다.
곧 실기 시험이 시작된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라디오 광고를 빌려 말하자면 지금의 내 심정은 이렇다. “내 딸아, 아빠는 최선을 다한 네 모습이 더 자랑스럽구나.” 그리고, 사랑한다. 언제까지나.
최석운 화가
[청사초롱-최석운] 아버지와 딸
입력 2015-12-08 1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