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면 벗은 오타쿠의 생얼 음침한 찌질남 아니었네!

입력 2015-12-08 17:40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원조 오타쿠’로 등장하는 안재홍(김정봉 역·오른쪽)이 식탁에서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들고 이름이 ‘두마리’인 사람을 찾고 있는 장면(위 사진). 애니메이션 ‘도라에몽 덕후’로 알려진 배우 심형탁이 대형 도라에몽 옆에서 포즈를 취하는 모습이다. tvN·심형탁 인스타그램 제공

‘일반인 코스튬플레이’(일코)라는 말이 있다. 만화, 영화, 게임, 캐릭터, 연예인 등에 빠진 ‘오타쿠(御宅·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지만 오타쿠가 아닌 척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오타쿠 성향은 숨기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오타쿠는 1980년대 일본에서 생긴 말이다. 우리나라에 건너오면서 ‘오덕후’ ‘오덕’ ‘십덕후’(오덕후보다 2배는 심각한 오덕후라는 의미) 등으로 변형됐다. ‘덕질’(좋아하는 대상을 파고드는 행위)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일본에서든, 한국에서든 오타쿠와 연관된 말에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다.

그런데 경멸과 우려의 시선을 피해 주로 음지에 머물렀던 오타쿠들이 최근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다기보다는 대중문화의 여러 영역에서 오타쿠를 찾아내고 있는 게 사실에 더 가깝다. 방송 드라마, 예능, 만화, 1인 방송 등을 통해 오타쿠가 다양하고 긍정적으로 조명되고 있다. 오타쿠에 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도 조금씩 걷히고 있는 중이다.

◇오타쿠를 초대합니다=대중문화에서 오타쿠는 보통 우스꽝스럽거나 위험한 사람으로 그려졌다. 오랫동안 많은 이들이 오타쿠 하면 ‘안경 뒤에 음침한 눈빛, 생기 잃은 얼굴, 뚱뚱한 몸’을 떠올렸다. 방송이나 영화 등에서 대체로 그런 모습으로 그려졌다. 오타쿠의 수집벽 등을 다루면서 ‘오타쿠=위험한 사람’으로 등장하는 일도 흔했다. 오타쿠는 대체로 비호감이었다.

최근 오타쿠에 대한 대중의 호감 지수가 높아지고 있다. 딱 봐도 오타쿠가 떠오르는 외모의 드라마 캐릭터가 오히려 크게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응팔)의 안재홍(김정봉 역)이 대표적이다.

응팔의 등장인물 소개를 보면 김정봉은 ‘원조 오타쿠’라고 적혀 있다. 드라마 속에서 정봉은 음반과 우표 등을 모으고, 컴퓨터 오락인 보글보글 끝판을 깨기 위해 오락실에서 온종일 보낸다.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끼고 다니며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사람을 찾는 등 독특한 행동을 하지만 시청자들은 그런 그의 모습을 ‘귀엽다’며 좋아한다.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은 오타쿠 캐릭터로 꼽힐 만하다.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도라에몽’에 빠져 있는 탤런트 심형탁은 ‘도라에몽 덕후’라는 게 알려지면서 오히려 유명세를 탔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에 잘생긴 배우가 오타쿠로 드러나자 ‘엉뚱한 매력’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아예 오타쿠를 ‘모셔오는’ 프로그램도 있다. MBC 예능 ‘능력자들’이다. 무한도전, 오드리 햅번, 모차르트, 치킨, 추리, 막걸리 등 다양한 분야에 빠져 있는 오타쿠들을 불러 모았다. 시청률은 5% 안팎이지만 온라인에서는 등장인물들이 꾸준히 회자될 정도로 인기다.

◇오타쿠의 창조성에 주목하다=네이버 모바일 스타캐스트 코너의 간판에는 ‘일상이 덕질을 방해해선 안 된다’고 적혀 있다. 스타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모아놓은 스타캐스트는 연예인 오타쿠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일코’가 필요했던 연예인 오타쿠들에게 일상에 갇혀 있지 말고 마음 놓고 즐기라고 손짓한다.

오타쿠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에는 ‘오타쿠는 일상생활을 제대로 영위하지 못 한다’는 편견도 담겨 있었다. 하지만 대중문화가 오타쿠를 주목하고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리면서 이런 시선이 조금씩 걷히고 있다. 오타쿠의 창조성에 주목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능력자들’을 연출하는 이지선 PD는 “‘무한도전’에 나온 아이유 덕후(가수 겸 작곡가 유재환)를 보면서 ‘한 가지만 보고도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오타쿠는 이 시대의 새로운 인재, 신(新)지식인”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도 오타쿠 문화를 긍정적으로 접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무언가에 몰입하다보면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는 “창조를 위해서는 무언가에 미친 듯이 몰입하는 이들이 필요하다. 주변의 오타쿠들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했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