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좌파 정권 몰락] 왜 몰락했나… 원자재 값 폭락에 경제 주름살 민심 등돌려

입력 2015-12-07 21:30
수감 중인 베네수엘라 야권 지도자 레오폴도 로페스의 아내인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 전 국회의원(앞줄 왼쪽 첫번째)을 비롯해 헤수스 토레알바 민주연합회의(MUD) 대표(앞줄 왼쪽 네 번째) 등 야권 인사들이 7일(현지시간)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 당사에서 총선 승리가 확정된 뒤 환호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에서 야권이 의회 다수당을 차지한 것은 1999년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이후 처음이다. AFP연합뉴스


외교·안보전문 격월간지인 ‘포린어페어스’는 2006년 3, 4월호에 ‘라틴아메리카의 좌선회(Latin America’s Left Turn)’라는 에세이를 실었다. 멕시코 지식인 호르히 카스타네다가 쓴 이 글은 1999년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부상으로 시작된 남미 좌파정부의 잇단 집권을 시대의 추세로 분석해 주목받았다. 하지만 차베스 집권 후 16년 만인 올해 들어 ‘분홍 물결(pink tide)’로 불리는 남미의 좌파 바람이 잦아드는 기색이 역력해졌다.

나라마다 사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남미에서 좌파 퇴조의 밑바닥에는 국제경제 환경의 급변이 깔려 있다. 사실상 1년 새 반 토막 난 원유 등 국제 원자재 가격이 급락하면서 여기에 성장의 원동력을 주로 의존해온 남미 국가들이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다. 주요 수출국이었던 중국 경제의 둔화도 어려움을 더해주고 있다.

7일 블룸버그 통신 집계에 따르면 지난 4일 기준 원유, 구리 등 글로벌 19개 원자재 가격을 기반으로 하는 CRB지수는 183.2를 기록했다. 이는 올 들어 26%가량 하락한 것이다.

남미에서 가장 급진적인 좌선회를 했던 베네수엘라의 경우 전체 수출의 95%를 차지하는 원유 가격 폭락으로 내년에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할 가능성이 높다. 사실상 국가파산 상태인 셈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베네수엘라 국내총생산(GDP)은 10%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외환보유액을 지키기 위한 정부의 수입 규제로 각종 필수품 가격이 급등해 인플레율은 지난해 대비 200%에 이른다.

특히 이번 선거 결과는 차베스 전 대통령이 16년 전 시작한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에 근거한 사회주의, 즉 ‘차비스모(Chavismo)’의 장래에 전환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마두로 대통령은 차베스를 계승해 고유가에 바탕을 둔 재정 수입으로 무상의료, 빈곤층에 대한 보조금 지급, 인근 중남미 빈곤국 지원 등을 시행해 왔지만 그 한계가 분명해졌다.

야권의 의회 장악이 얼마나 마두로 정권에 압력을 행사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일부는 이번 야당의 승리로 마두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정치범 석방 등이 가속화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아르헨티나에서 지난달 22일 좌파 집권 12년 만에 중도 우파 ‘공화주의 제안당(PRO)’의 마우리시오 마크리 후보가 당선된 것도 재정적자와 실업률 고공행진, 25%에 이르는 인플레율 등 경제난이 배경이었다. 브라질에서는 불황이 심화하고 실업률은 치솟는 가운데 국영 에너지 업체 페트로브라스와 관련한 부패 스캔들까지 번져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남미 좌파정권의 약화가 곧 1990년대식 우파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우파가 표심을 끌어들이는 요인은 주로 정치 지도자의 온건함과 실용적 정책대안 때문”이라며 “남미인들은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자는 강경보수보다는 중도 쪽으로의 완만한 접근을 선호하는 듯하다”고 분석했다. 베네수엘라의 경우도 차베스 집권 이래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혜택을 입은 빈곤층 등 광범위한 좌파 기반이 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급격한 ‘우향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배병우 선임기자, 조효석 기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