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했던 폭력과 불법은 없었다. 차벽과 물대포도 보이지 않았다. 복면과 폭력이 있던 자리를 풍자적인 가면 퍼포먼스가 채웠고, 쇠파이프를 쥐었던 손에는 꽃이 들렸다. 집회장 곳곳에선 노랫소리와 웃음이 흘러나왔다. 5만여명(주최 측 추산, 경찰 추산 1만4000여명)이 서울 도심을 가득 메운 5일 ‘2차 민중총궐기 대회’는 지난달 14일 1차 대회와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폭력 대신 ‘풍자의 가면’
집회에는 ‘복면금지법’ 입법 추진에 반대하는 뜻으로 다양한 가면이 등장했다. 금지에 저항하는 즐거운 풍자였다. 세종문화회관 앞에는 박근혜 대통령 얼굴을 확대한 대형 가면이 등장했다. 임옥상 화가 등 문화연대 모임이 만든 것이다. 이들은 “집회 결사의 자유가 지켜지지 않는 모습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됐다. 오늘은 가면을 쓰고 즐겁게 투쟁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환경운동연합 등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단체는 물감으로 가면에 색칠할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주변을 지나던 아이들은 거리낌 없이 다가와 가면에 형형색색 물감을 입혔다. 여섯 살, 일곱 살 아이와 함께 나온 김미정(32·여)씨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이지만 한 번쯤 경험하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집회에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가면에 색칠하던 아이들은 추운 날씨에도 오랫동안 한자리를 지켰다.
시민들은 직접 가면을 준비해 오기도 했다. 서울광장에 모인 참가자들은 하회탈춤에 등장하는 이매탈 각시탈 등 가면을 쓰고 있었다. 연극연출가 원을미(40)씨는 가요를 틀어 놓고 지나는 이들과 같이 춤을 췄다. 원씨는 “복면 금지에 대한 저항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차벽 대신 폴리스라인
차벽과 밧줄, 쇠파이프와 물대포로 어지럽던 거리는 꽃길이 됐다. 5대 종단(개신교 성공회 불교 원불교 천도교)이 모인 종교인평화연대는 꽃을 들고 나와 평화집회를 염원했다. 이들은 호소문을 통해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분열과 갈등의 논리는 이제 지양돼야 한다”며 “다름을 이해하고 소통·존중할 때 다시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했다. 호소문을 낭독한 뒤 이들은 꽃을 들고 서울광장 주변을 침묵하며 행진했다.
민중총궐기투쟁본부 측은 1차 집회에서 물대포에 맞아 중태에 빠진 농민 백남기(69)씨의 쾌유를 기원하는 의미로 카네이션 1만 송이를 준비해 나눠줬다. 경찰은 이들을 에워싸는 차벽을 설치하지 않았고, 차벽이 없으니 끌어내릴 밧줄도, 쇠파이프도 필요하지 않았다.
폴리스라인을 무단 침범하는 일도 보이지 않았다. 경찰이 배정한 2개 차로가 참가자 규모에 비해 좁아서 잠시 소란이 일었지만 행진은 평화롭게 진행됐다. 행진 구간에 참가자들이 길게 늘어선 탓에 1시간여가 지날 때까지 서울광장에는 아직 출발하지 못한 대열이 남아 있기도 했다.
민주노총은 “경찰이 대규모 인원의 행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2개 차로만으로 협소하게 경로를 강제했다”고 항의성명을 냈다. 이에 경찰은 “참가인원이 훨씬 많을 것을 알면서 스스로 7000명이 2개 차로로 행진하겠다고 약속해 법원에서 집회 허용을 받은 마당에 ‘2개 차로로 제한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라고 맞섰다.
집회를 지켜본 ‘감시의 눈’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등 야당 의원 30여명은 함께 행진도 하며 준법집회를 독려했다. 전·의경 부모모임 회원 10여명도 현장을 찾아 평화집회를 촉구했다.
여러 단체가 집회를 지켜보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인권운동사랑방 국제앰네스티 등은 ‘인권침해감시단’이라고 적힌 파란 조끼를 입고 집회 현장을 돌았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인권침해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지 지켜봤다. 인권운동사랑방 관계자는 “경찰이 폭력을 행사하거나 불법 채증 등 과잉 대응을 하는지 집중적으로 살펴봤다”고 했다.
언론의 취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는 ‘취재방해감시단’도 자리를 지켰다. 방송기자연합회 등 언론단체는 11·14집회 때처럼 경찰이 취재기자를 향해 물대포를 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현장 곳곳을 누볐다. 집회 현장에 인권지킴이단을 보낸 국가인권위 관계자는 “오늘 집회는 경찰 차벽이나 다른 인권침해 사례가 없이 조용하게 진행됐다”며 “집회 참가자의 폭력 행위도 보이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사라진 술판과 쓰레기
지난달 집회에서 지적됐던 도로 위 술판이나 쓰레기더미는 자취를 감췄다. 행진이 시작되자 일부 참가자들은 서울광장에서 쓰레기를 주웠다. 대형 쓰레기봉투에 담으면서 현장을 정리했다. 행진 도중에도 거리에 마구잡이로 전단을 살포하는 일은 없었다. 추운 날씨에 주변 노점에서 간식거리를 사먹는 참가자들이 있었지만 각자 자신의 쓰레기를 직접 치웠다. 서울대병원 인근에서 열린 마무리 촛불집회 이후에도 참가자들은 질서를 지키며 자리를 떴다.
심희정 김판 홍석호 기자 simcit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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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12-06 2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