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 넘은 박창환 선교사 20대 신학생들과 ‘톡’하다…“목사 되라는 가족회의 통보에 반발했지만”

입력 2015-12-06 19:40
박창환 선교사(맨 오른쪽)가 지난 1일 서울 광진구 광장로길 장로회신학대에서 선교사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선교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있다. 박 선교사 맞은편에 앉은 이는 장신대 세계선교연구원장 박보경 교수. 장신대 제공

“아버지가 선교사니까 나도 선교사여야 한다는 생각은 옳지 못해요. 목사만 제사장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됐습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거룩하고 성실하게 사용하면 되는 것이지요.”

박창환(91) 선교사는 지난 1일 한 장로회신학대 학생이 “아버지가 선교사고 저도 목회를 꿈꾸고 있는데 조언을 해 달라”고 요청하자 이렇게 답했다. 장신대 세계선교연구원(원장 박보경 교수)이 선교사들과 학생들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마련한 ‘온하우스톡’ 행사의 첫 주자로 초청된 자리였다.

박 선교사의 큰할아버지 박태로 선교사는 1913년 한국교회가 중국에 파송한 제1호 선교사다. 박 선교사 역시 한국교회 최초로 인도네시아에 파송됐다. 그의 아들 박선진 선교사는 미국에서 11년간 목회를 하다 현재 멕시코 선교를 준비 중이다.

박 선교사는 구순이 넘은 나이에도 힘 있는 목소리로 논리 정연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어느 날 가족들이 회의를 하더니 저에게 ‘넌 목사가 돼야한다’고 통보를 했어요. 전 반발했죠. 내성적이라 사람들 앞에서 말도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때 어머니가 편지를 썼다. “목사의 사명은 사람이 감당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하는 거란다.”

박 선교사는 고등학교 졸업 뒤 일본 도쿄제국음악학교에 입학해 음악을 공부하다 평양신학교로 옮겼다. 1946년 10월 월남한 뒤엔 조선신학교(한신대)에서 수학하다 1949년 새로 개교한 장로회신학교로 옮겨 졸업했다. 졸업 직후 모교에서 히브리어 헬라어 영어를 가르치는 전임강사로 활동했다.

그가 인도네시아로 선교를 떠난 건 1972년이다. “인도네시아에서 말하는 ‘종교의 자유’는 그들이 믿는 종교를 존중해줘야 한다는 걸 의미해요. 전도를 해선 안 된다는 얘기죠. 그런데 당시 같이 갔던 아들이 다녔던 초등학교가 가톨릭학교였어요. 학교에서는 종교를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거죠. 그때 무릎을 치며 ‘아, 이거다’ 싶었어요.”

박 선교사는 곧바로 유치원을 개원했다. 풍금 등 악기와 도화지 크레파스 등 학용품을 충분히 마련하니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청년들에겐 영어성경으로 영어를 가르치며 전도했는데 3년 사역을 하는 동안 8명이 함께 예배를 드렸고 3명이 세례를 받았다. “한국에 와서 선교보고를 하는데 전도한 교인 수가 많지 않으니까 ‘실패한 것 아니냐’는 뒷얘기가 나오더라고요. 선교는 몇 명 전도했는지로 평가해선 안 된다는 걸 느꼈어요.”

당시 박 선교사와 함께 인도네시아로 갔던 셋째 아들은 8살이었다. 3년 사역 후 귀국했더니 셋째 아들이 한국생활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했다. 이후 미국 매코믹신학대 교수의 추천으로 그 학교에 입학했다. 박 선교사는 “선교 사역을 하다보면 손해 보는 경우도 생길 수 있지만 하나님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신다는 걸 잊지 않기 바란다”고 학생들에게 전했다. 그는 인도네시아 외에 러시아 모스크바와 니카라과 등에서 11년간 선교활동을 했다.

박 선교사는 “한국교회에 ‘대교회주의’가 만연해 있어 ‘성경연구’에 소홀한 측면이 있다”고 꼬집었다. 교인들을 끌어 모으려고만 하니 일주일 내내 심방 등 교인 관리를 하느라 막상 성경을 연구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박 선교사는 “목사들이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지 못한 채 설교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선교사를 희망하는 신학생들에게 강한 어조로 당부했다.

“성경은 보기만 해선 안돼요.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걸 알기 위해 연구하고 노력하는 선교사가 되길 바랍니다.”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