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저금통, 생명 구하는 버스가 되었어요

입력 2015-12-04 19:15
굿파트너즈의 ‘희망천사 저금통 프로젝트’에 학생대표로 참가한 최하은(왼쪽), 구세림양이 버스 기증을 위해 모은 저금통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파다비 스리푸라 주민들에게 환자수송용 버스를 전달하기 위해 스리랑카를 방문한 굿파트너즈 방문단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허진 굿파트너즈 파다비 스리푸리 센터장, 문순용 안산동산고 교감, 구세림, 최하은, 정재준 굿파트너즈 대표, 박미림 굿파트너즈 해외사업팀장, 보파기 디네쉬 현지 봉사자.
“오랜 꿈이 실현되는 느낌이랄까요. 꿈만 같아요.”(최하은·18·안산 동산고)
“기부에 동참해 본 적은 많지만 그것이 열매 맺는 현장을 목격하는 것은 처음이에요. 벌써부터 가슴 벅차요.”(구세림·18·안산 성안고)

지난 2일 저녁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만난 열여덟 동갑내기 소녀들의 표정엔 특별한 선물을 전달할 생각에 설렘이 가득했다. 최하은양과 구세림양은 스리랑카 북동부 외곽에 위치한 파다비 스리푸라 지역 내 만성신장질환(CKD·Chronic Kidney Disease) 환자들의 병원 수송을 위한 버스 (사진) 기증 행사에 학생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두 달여 전부터 준비를 해왔다.

두 사람의 스리랑카 여정은 작은 저금통에서 시작됐다. 해외 저개발국가에 대한 의료·교육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는 국제NGO 굿파트너즈(이사장 김인중 목사)가 파다비 스리푸라 지역 주민들에게 기증할 버스를 마련하기 위해 기획한 ‘희망천사(버스) 저금통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동산고 학생회장을 맡고 있는 최양에게 스리랑카 방문은 학우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뜻 깊은 일이었다. “회장 선거에 나설 때 공약 중 하나가 ‘엔젤 뱅크 운동’(낙후된 지역에 우물을 파주기 위한 모금 활동)이었어요. 올해 4월엔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네팔에 학우들의 정성을 모아 구호성금을 보냈어요. 이번엔 ‘희망천사’ 소식을 듣고 전교생에게 나눠 준 저금통을 모았습니다. 커다란 트럭에 저금통을 실어 보내던 날의 감동을 잊을 수 없어요.”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는데다 한 달 후면 고3이 되는 시점인데 부담은 없었을까. 구양은 “스리랑카 방문은 단순한 봉사가 아니다.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생의 중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고 당차게 말하며 비행기에 탑승했다.

하늘길 5700㎞를 날아가 도착한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는 9시간 전 인천의 날씨와는 정반대였다. 가만히 서 있어도 90%가 넘는 높은 습도 탓에 숨이 가빠왔다. 한겨울에 해당하는 시기지만 28도를 넘나들었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와 교통법규를 잊은 듯한 ‘툭툭이’(세발 오토바이 택시)를 가까스로 피해 콜롬보에서 북동쪽으로 302㎞, 8시간을 내달려 도착한 파다비 스리푸라는 판잣집들이 듬성듬성 부락을 이루고 있었다. 굿파트너즈 방문단과 함께 5일(현지시간) 찾아간 이곳에서 CKD 환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3592가구 1만2705명(2012년 기준)이 사는 이곳엔 1990년대부터 CKD가 급속히 확산됐다. 전체 주민의 약 10%인 1200여명이 이 질환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대부분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할 가장들이다. 그중 400여명은 신장 기능을 거의 상실해 정기적으로 투석치료를 받지 않으면 생존이 힘든 상태다.

굿파트너즈의 스리랑카 현지 협력단체인 ASD(Association for Social Development)의 에드먼드 자야싱헤 회장은 “CKD는 1930년대 유행했던 말라리아 이래 스리랑카가 겪고 있는 최악의 보건·환경적 재앙”이라고 설명했다. 이 질환은 신장결손과 다르게 원인이 확실하지 않다. 세계보건기구(WHO)를 비롯해 여러 조사 기관의 공통된 견해는 오염된 식수 음용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앰브 위자야시리 ASD 이사는 “1960년대 시작된 식량증산 캠페인에 따라 화학비료와 농약을 다량 사용한 결과로 보인다”며 “파다비 스리푸라는 이 질환의 피해가 가장 심각한 지역이며 CKD 사례연구가 처음 행해진 곳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인근엔 투석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이 없다. 환자들은 투석치료를 받기 위해 짧게는 71㎞, 멀게는 200㎞ 넘는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자동차로 2∼4시간을 가야하는 거리지만 비포장도로, 낡아서 고장이 잦은 버스 등 열악한 교통 환경 때문에 병원 예약시간을 지키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주 2, 3회 투석을 받아야 하는 환자의 경우는 월수입의 절반을 치료비에 써야 한다.

이번 여정에 동행한 정재준 굿파트너즈 대표는 “일정이 늦어져 병원 근처에서 숙박을 해야 하는 날엔 비용이 배로 든다”며 “빈곤한 처지에 있는 이들은 치료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할 수 없어 대부분 집에서 죽음을 맞는다”며 안타까워했다.

‘이들에게 안전한 교통수단이 있다면?’ 바로 여기에서 ‘희망천사 저금통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정 대표는 큰 액수의 후원자를 찾지 않았다. 작은 정성을 모아 줄 ‘밀알’들을 찾았다. 그게 바로 저금통이었다. 지난해 12월 말부터 굿파트너즈 본부가 있는 경기도 안산시 관내 학교와 교회, 기업 등 시민들에게 저금통을 배부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1년여 만에 저금통 5000여개가 수거됐다. 수거율은 80%가 넘었다.

5일 파다비 스리푸라 지방자치단체 청사에서 진행된 버스 기증식에는 지역 주민, 정부 책임자, ASD 관계자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희망천사’가 돼 줄 54인승 버스의 좌우편에는 ‘한국인이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라는 문구가 영어와 부족어인 싱할라어로 새겨졌다. 정 대표는 버스에 부착된 태극기와 스리랑카 국기를 바라보며 “이곳 주민들이 새로운 희망을 갖고 그들의 손으로 미래를 가꿔가길 간절히 바란다”고 전했다. 장원삼 주스리랑카 대한민국대사는 “정부는 물론 다른 구호기구도 손길이 닿지 않았던 지역에서 굿파트너즈가 큰일을 했다”며 축하했다.

기증식에서는 버스와 함께 주민들의 안전한 식수공급을 위한 정수시설이 추가로 전달됐다. 굿파트너즈는 2013년부터 ‘희망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파다비 스리푸라 지역에 역삼투 방식의 정수시설을 설치해 주민들에게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물을 제공하고 있다. 지난 3년간 유치원 8곳과 마을공동체 4곳에 정수시설이 설치돼 CKD 환자 예방 기능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CKD 환자 자녀들이 학업을 중단하지 않도록 50명의 환자 가정을 선정해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정 대표는 “희망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붙들고 이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굿파트너즈는 올해 3월부터 ‘파다비 스리푸라 컴퓨터·언어훈련센터’를 설립해 지역 청년들의 직업훈련에 나서고 있다. 교육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진정한 자립의 첫걸음이라는 생각에서다. 지역의 일반 학교에는 컴퓨터가 5∼6대밖에 없지만 이곳에서는 25명이 동시에 컴퓨터 교육을 받을 수 있다. 또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청년들이 늘면서 관심이 높아진 한국어 교육을 진행해 한국 기업에서 근무하길 희망하는 스리랑카 국민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학생대표로 이번 일정에 참여한 구양과 최양은 “작은 정성이 이렇게 아름다운 선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다”며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기부인 듯하다”고 말했다.

파다비 스리푸라(스리랑카)=글·사진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