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예산안과 쟁점 법안을 털어낸 여야의 발걸음이 오히려 무거워졌다. 여야 할 것 없이 ‘법안 맞바꾸기’식 협상을 진행한 당 지도부에 대한 불만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국회 상임위원회가 여야 협상을 추인하는 거수기로 전락했다는 자조의 목소리도 크다. 여야 간 감정의 골은 더욱 깊게 파였다. 남은 정기국회와 곧이어 열릴 임시국회에서 성과물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3일 국회의 법안 심사는 사실상 중단됐다. 특히 이날 새벽 여야 지도부가 합의 처리한 5개 법안(관광진흥법, 국제의료사업지원법, 대리점거래공정화법, 모자보건법, 전공의지위향상법)을 다룬 정무·교문·복지위는 후폭풍이 컸다. 상임위 차원에서 쟁점 사항이 정리돼 방망이만 두드리면 되는 법안들이 수두룩하게 쌓였는데, 여야 협상 후에 되레 발이 묶인 것이다.
상임위별로 입장은 뚜렷하게 갈렸다. 야당이 원했던 대리점법을 내준 정무위에선 새누리당이 협상의 주도권을 잃어버렸다. 정무위는 전날 본회의 시간을 맞추기 위해 부랴부랴 법안소위와 전체회의를 열어 대리점법 딱 하나만 처리했다. 전체회의 때는 의결정족수를 채우기 위해 새누리당 소속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까지 참석했다. 새누리당 의원들마저도 “회의에 최 부총리가 온 건 처음”이라고 수군댔다. 어렵사리 대리점법을 처리한 뒤로는 다음 회의 일정조차 잡기 어려워졌다. 반대로 여당이 목을 맸던 관광진흥법을 처리한 교문위에선 새정치민주연합이 ‘을’의 입장이 됐다. 여야 주력 법안을 함께 통과시킨 복지위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복지위 소속 한 의원은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서로 연관도 없는 법안들을 흥정하듯 주고받은 것도 문제지만 정작 이렇게 통과된 법안이 현장에서 당초 기대했던 효과를 낼 수 있을지 심히 우려된다”고 했다.
여야 지도부는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었다. 전날 의총에서 의원들로부터 “도대체 얻은 게 뭐냐”는 뭇매를 맞았던 새정치연합 이종걸 원내대표는 정책조정회의에서 “소임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질책을 무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고 몸을 낮췄다. 그러면서 “대여 관계를 다르게 설정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새누리당에서도 드러내놓고 얘기하는 의원이 없을 뿐 지도부의 정치력 부재를 탓하는 목소리가 크다. 한 의원은 “예산안과 법안 처리를 잘했다고 박수치는 사람이 지도부 빼면 누가 있느냐”며 “대통령 관심 법안(관광진흥법) 하나 때문에 16개 상임위에서 논의하던 법안들은 전부 다 날아갔다고 보면 된다”고 꼬집었다. 당내 비판에 직면한 여야 지도부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상대를 향한 공세 수위를 높일 가능성이 크다.
국회 차원에선 자성의 목소리가 번졌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예산안 통과 후 “지금 국회는 국회의원과 상임위는 보이지 않고 정당 지도부만 보이는 형국이다. 의원은 거수기가 되고 상임위는 겉돌고 있다”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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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12-03 2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