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니엘 호손의 단편 ‘큰 바위 얼굴’은 사람이 무엇을 보고 사느냐에 따라 사람의 얼굴과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주인공 어네스트는 평생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을 만나고자 기다린다. 동시에 자신도 큰 바위 얼굴처럼 누구보다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아간다. 세월이 흘러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는 성공한 부자, 장군, 정치인이 나타나지만 그저 소문일 뿐 정작 그들은 큰 바위 얼굴을 닮지 않았다. 훗날 마을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어네스트가 큰 바위 얼굴과 꼭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어려서부터 큰 바위 얼굴을 동경하며 그런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 이가 큰 바위 얼굴과 꼭 닮은 사람이 된 것이다.
얼굴은 ‘영혼의 통로’이다. 한 사람의 영혼의 모습이 얼굴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얼굴을 이루고 있는 근육은 80개로 사람은 7000가지의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의 마음은 얼굴의 근육을 통해서 표정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우리는 마음과 영혼을 잘 다스리고 성숙한 인격을 갖춰야 한다.
요즘 정직하게 음식을 만드는 식당주인을 찾는 TV프로그램이 있다. 선정 된 식당주인들의 얼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정직함과 성실함이 깊게 배어있으며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환한 미소가 있다. 사람의 표정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오랜 세월 나 자신이 만들어 버린 얼굴이기에 그 얼굴을 바꿀 수 있는 사람도 결국 나 자신뿐이다.
성경에 보면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인 스데반은 자신을 죽일 죄목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들 앞에서도 천사 같은 얼굴을 보였다고 나와 있다. 그는 성난 유대인들이 자신에게 돌을 던져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며 죽음을 맞이한다. 사도행전 7장 55∼56절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라고 나와 있다.
스데반은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보지 않고 언제나 그랬듯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주목하고 주님을 바라보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핍박하고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들에 대해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께 간구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그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데반이 천사의 얼굴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도 그가 주님의 마음을 닮은 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어떤 얼굴로 비춰지고 있을까. 세상 사람들도 닮고 싶어 할만한 큰 바위 얼굴 같은 존재일까. 아니면 기억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일까. 불행히도 현재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지 못하고 있다. 그 못난 얼굴의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우리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들조차 스데반의 얼굴에서 천사의 얼굴을 본 것처럼 세상이 우리의 얼굴에서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주목하고 주님의 마음을 닮아갈 때만 가능한 일이다.
이창교 목사 (창원 상남교회)
[시온의 소리-이창교] 얼굴에 책임을 지자
입력 2015-12-03 1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