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이 3일 내년도 예산안을 처리했지만 심의과정은 법을 깡그리 무시한 ‘꼼수’의 연속이었다. 국민 혈세가 허투루 쓰이는 일이 없도록 ‘현미경’ 심사에 몰입했어야 할 기간, 정치권의 관심은 내년 총선을 의식한 ‘지역구 선심 예산 따먹기’와 ‘중점법안 맞교환’에만 쏠려있는 듯했다. 흥정 대상을 정하기 위해 법의 근수(斤數)까지 따지는 발언은 국회의 품격 상실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무엇보다도 집권 여당은 386조원에 달하는 국민 혈세를 볼모로 박근혜정부 역점과제인 노동개혁 5법 처리를 시도했다. 노동개혁의 절박성을 이유로 들었지만, ‘예산안·법안 연계’라는 구태를 공식석상에서 부끄러움 없이 드러냈다. 과연 박수를 보낼 국민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상임위 중심주의’ 원칙을 정면으로 배치한 압박 전술이었다.
야당 역시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교육공무직법’을 새누리당이 원하는 ‘관광진흥법’과 맞교환하려고 ‘끼워팔기’를 시도했다. 학교와 교육행정기관의 비정규직 직원 처우를 개선하는 내용을 담은 법안이지만 여야 협상과정에서 대리점거래공정화법(일명 ‘남양유업법’)과 ‘딜’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관광진흥법이 박근혜 대통령이 시급히 처리하라며 여당에 내준 숙제였기 때문에 야당 내부에선 2일 “관광진흥법은 대리점법 1개가 아니라 10개 정도 무게로 거래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정치의 근간인 ‘대화와 타협’이 ‘흥정과 거래’로 전락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야당이 이해관계를 따져서 (법안을) 매번 흥정거래의 대상으로 삼으면 정치권은 무능의 대명사가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여당에도 해당된다. 정의화 국회의장과 새정치연합 이상민 법제사법위원장의 국회법 원칙론에 막혀 여야 심야합의가 8시간 만에 좌초될 뻔한 ‘해프닝’은 국회가 편법을 얼마나 경계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합의가 깨질 조짐을 보이자 여야 모두 지도부를 비난했고, 지도부는 ‘네 탓’ 공방을 펼치며 상대방에 책임을 전가하기 바빴다.
정치권은 스스로 예산심의권을 저버려 졸속심사 비판도 피하기 어렵다. 여야는 예산안심사 초반 1주일을 역사 교과서 국정화 관련 예비비 문제에만 매달렸다. 폭력시위 진압 논란이 제기되자 살수차 교체 예산안을 놓고 설전을 벌였다.
내년 총선 지역구 획정 등 ‘선거 룰’ 싸움으로 예산심의 기간을 고스란히 까먹었고, 예산안 법정처리시한 하루 전에서야 지도부 회동을 벌였다. 그야말로 ‘깜깜이’ 예산 비판을 자초한 셈이다.
지도부가 쟁점법안 맞교환을 시도하는 동안 의원들은 지역구 예산 챙기기에 골몰했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 내 소위 위원들에게는 민원 문자가 쉴 새 없이 쇄도해 다 읽을 시간도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지역구를 위한 쪽지예산 비판 기사는 오히려 선거홍보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은 국회의원들은 흔했다. 기획재정부 공무원은 “이번에는 여당이 예산을 깎으려는 야당을 막아주지 않고 오히려 정부 중점사업 예산을 흔들려 했다”는 불만도 토로했다.
지역발전의 혈관이 되는 사회간접자본(SOC) 예산은 야당의 영호남 불평등 문제로 엉뚱하게 증액됐다. 여야는 사업의 필요성과 시급성을 따져 금액을 조정하는 대신 정치의 논리를 들이대 대구·경북(TK)예산 증액분은 유지하고 호남지역 예산을 늘리는 식으로 합의를 봤다. 내년도 예산 386조원은 이렇게 통과됐다. ‘웃픈’ 우리 정치의 맨얼굴이다.
전웅빈 정치부 기자 im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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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12-02 22:20 수정 2015-12-03 0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