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뉴스] 정구가 말랑? 노년이 단단… ‘건강 100세’ 정구 배워보세요

입력 2015-12-04 04:00 수정 2015-12-06 17:27
지난달 14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테니스 코트에서 열린 서울시 생활체육회 정구대회에 출전한 동호인들이 정구 볼을 들고 밝은 표정으로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곽경근 선임기자
테니스를 치다 정구로 전향한 이병용씨는 팔순을 앞둔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않은 경기력으로 정구를 즐기고 있다. 곽경근 선임기자
서울시 생활체육회 정구대회에서 한 동호인이 경기 중 넘어졌지만 개의치 않고 활짝 웃고 있다. 곽경근 선임기자
서울 용산구에 거주하는 이병용(77)씨는 37년간 테니스를 쳤습니다. 일반 동호인대회에 나가서도 곧잘 입상할 정도의 실력을 연마했습니다. 그러나 60대 중반이 되면서 테니스 코트에 나가는 횟수가 점점 줄었습니다. 팔꿈치, 무릎, 허리 등 안 아픈 곳이 없었고 나이가 들수록 회복시간이 더뎠습니다. 마침내 오른쪽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면서 운동을 그만둬야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테니스 코트에서 펼쳐지는 정구를 처음 접하면서 새로운 스포츠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100년이 훨씬 넘는 정구 역사

정구는 구한말 김옥균 선생에 의해 일본에서 도입된 스포츠입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 스포츠 중 하나죠. 1920년 시작된 전국체육대회에 정구는 육상, 야구, 축구 등과 함께 처음부터 정식종목으로 포함된 종목입니다. 앞서 일본은 서양 테니스가 동양인에게는 힘에 부치는 점에 착안해 변화를 시도합니다. 바로 새로운 고무공을 만든 것입니다. 기존 테니스 볼보다 가볍고 말랑말랑한 볼 때문에 라켓도 테니스 라켓처럼 무거울 필요가 없어집니다. 장년층은 물론이고 이씨처럼 팔순을 앞둔 노인들도 부상 염려 없이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스포츠입니다.

정구는 일제강점기부터 귀족스포츠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전국 각급 학교에 일제히 정구코트를 조성토록 했죠. 서울은 물론 전국 각 지방의 유지들이 정구를 통해 사교와 건강을 챙겼습니다. 테니스와 골프가 귀족스포츠로 인식되기 시작하던 1970년대 이전 한국의 귀족스포츠는 바로 정구였습니다.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정구가 비인기종목으로 전락한 계기는 1970년대 초 민관식 당시 문교부 장관의 테니스 장려책 때문이었습니다. 민 장관은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테니스 진흥을 위해 기존 정구인들이 테니스로 전향하도록 각종 유인책을 펼쳤죠. 정구와 테니스는 경기장 규격이 같아 전향이 용이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전통의 정구는 온갖 핍박(?)에도 불구하고 선수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2일 현재 대한체육회에 등록된 선수만 봐도 테니스가 1565명인 데 비해 정구는 1633명으로 더 많습니다. 테니스는 전 세계적으로 상금액수가 골프보다 많은 인기 종목이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정구의 저변이 만만치 않습니다. 서울에서는 정구경기를 관전하기 힘들지만 지방 중소도시에는 정구가 예전의 명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마추어 동호인의 활동도 활발하고요.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

정구는 일본이 종주국이지만 실력은 한국이 최고입니다. 한국은 지난해 인천아시안게임 7개 종목에서 모두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정구는 70여개국에 보급돼 있지만 실력은 한국과 일본, 대만 등 아시아가 최곱니다. 지난달 22일 인도 뉴델리에서 끝난 제15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한국은 7개 종목 가운데 6개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죠. 국제정구연맹도 박상하 대한정구협회장이 20년 넘게 이끌고 있습니다.

양궁처럼 국내 최고는 세계 1인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잠재력 있는 선수들이 계속 정구에 입문하고 있습니다. 정구는 올림픽종목은 아니지만 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 등에서 입상해 얻게 되는 연금점수를 상대적으로 쉽게 딸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체육연금 수혜자 가운데 정구 출신은 태권도, 양궁, 유도, 쇼트트랙 출신 다음으로 많은 것이 그 증거죠.

정구도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되면 한국의 효자 종목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실제로 한국과 일본은 올림픽 정식종목에 필요한 회원국 확보를 위해 지도자 파견 등 많은 애를 쓰고 있습니다. 야구가 소프트볼과 연맹체를 함께 형성해 올림픽 정식종목 복귀를 노리는 것처럼 정구도 테니스의 세부종목으로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죠. 하지만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입김이 센 유럽에서 정구는 여전히 테니스에 밀려 해당 국가 올림픽위원회에도 가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노년까지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구기

정구의 진정한 가치는 생활스포츠, 나아가 노인스포츠로서의 가치입니다. 스포츠는 건강증진은 물론 재미가 있어야 하고 부상이 없어야 생명이 깁니다. 정구는 볼이 가벼워 랠리가 오래 지속되고 손목을 사용한 다양한 기술이 테니스와 다른 각별한 흥미를 제공합니다. 테니스보다 앞뒤로 많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운동량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라고 합니다. 젊었을 때 테니스를 즐기다 노인이 돼 정구로 전향한 사례는 엄청 많습니다.

이병용씨는 “정구를 하면서 건강도 얻었다. 테니스처럼 재밌다”고 말합니다. 그는 80세를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젊은이 못지않은 경기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한정구협회는 1970년대부터 엘리트 대회에 장년부와 여자동호인 대회를 함께 치르고 있습니다. 대한체육회 56개 가맹 경기단체 중 이 같은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동호인들의 모임인 국민생활체육회 정구대회에는 60세 이상 어르신부가 별도로 치러집니다. 남자는 60∼64세, 65∼69세, 70∼74세, 75∼79세부가 있습니다. 80세 이상 선수도 다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구 전용코트가 드문 것이 이들의 아픈 현실입니다. 서울에 1000명 정도의 동호인이 있지만 광진구 아차산 배수지 체육공원에 2개 면의 코트가 유일한 전용코트랍니다. 지방에는 서울에 비해 코트도 많고 동호인 활동도 더 활발합니다. 대구·광주를 비롯해 경북 문경, 충북 영동·단양, 전남 순천, 전북 순창 등이 그런 곳이죠.

동호인들은 노인복지 차원에서라도 정구가 널리 보급됐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국민생활체육 전국정구연합회 곽제영 실무부회장은 “100세 시대 건강한 노인을 국가가 원한다면 정구만큼 좋은 것이 없다”면서 “게이트볼장처럼 전용 정구코트를 곳곳에 만들어 많은 노인들이 정구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한국 체육은 내년에 변혁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엘리트스포츠 중심의 대한체육회와 동호인 중심의 국민생활체육회가 통합하게 됩니다. 이에 맞춰 정구도 대한정구협회와 전국정구연합회가 합쳐집니다. 정구인들은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정구의 개명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미 국제무대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소프트 테니스(soft tennis)’가 그 새로운 이름입니다. 영어에 익숙해진 신세대들에겐 ‘정구’보다 더 친숙해질 수 있는 이름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서완석 체육전문기자 wssu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