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최현수] 군에 신뢰를 줘보자

입력 2015-12-02 17:37

수년 전 미국 뉴욕을 방문했을 때였다. 주말 저녁 번화가 타임스스퀘어를 메운 관광객들 사이에 하얀 군복을 입은 수병들이 눈에 띄었다. 군함이 정박한 것인지 7∼8명씩 무리지어 뉴욕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 붐볐지만 수병들과 부딪히면 사람들은 대부분 활짝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주고 주말을 즐기라고 격려했다. 마치 오랜 친구나 가족을 만난 것처럼 정겹게 대해줬다. 서울에서 이처럼 군인들이 밝고 자연스럽게 활보할 수 있을까. 군인들이 몰려다니는 모습을 정겹게 봐주는 시민들이 있을까. 고개가 저어졌다.

미군들이 군복을 입고 대도시를 활보할 수 있는 것은 국민들의 신뢰가 커서다. 2014년 미국 한 여론기관이 조사한 존경하는 직업군에 군인은 2위를 차지했다. 군은 미국민이 가장 신뢰하는 조직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제복을 입은 군인은 공공장소에서 최고 대우를 받는다.

해외에서 전사한 미군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오면 대통령이 공항에 가서 맞이한다. 지난 9월 말 마틴 템프시 전 합참의장 전역식에 참석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프란치스코 교황이 워싱턴을 방문해 숨 가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지만 2시간 동안 자리를 지켰다.

미군이라고 부정부패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기획득 과정에서 비리도 터져 나오고 군내 성범죄도 빈발하고 있다. 그럼에도 군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지 않는 것은 이들이 전 세계에서 피를 흘리며 국익을 대변하고 있어서다.

미국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독립전쟁에서부터 남북전쟁, 미·스페인 전쟁 등 숱한 전쟁을 겪으면서 미국은 가장 강한 국가가 됐다. 군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군에 대한 불신도 컸다. 독립전쟁을 수행한 것은 정규군이 아닌 민병대였다. 새뮤얼 애덤스는 1768년 보스턴 가제트지 편집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떤 국민이 나라 한복판에 강력한 군대를 두고 그들의 자유가 지속되리라고 여긴다면 허황되다”며 “그 군대가 국민의 직접 통제 하에 있다면 모를까. 그렇다고 해도 위험하기는 매한가지”라고 강조했다. 그는 상비군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20세기 석학 새뮤얼 헌팅턴은 저서 ‘군인과 국가’에서 군에 대한 철저한 문민통제를 강조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미국민들은 ‘신뢰’의 힘을 잘 알고 있다. 어떤 존재든 완벽하게 신뢰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믿어줄 때 이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2004년 예멘에서 정박 중이던 구축함 콜 호가 알카에다 자살폭탄 테러로 승조원 19명이 죽고 39명이 부상했다. 윌리엄 코언 당시 국방장관은 어처구니없이 당한 경계 실패를 탓하지 않았다. 대신 침착한 대응으로 많은 장병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했다.

요즘 우리 군인들은 민간인과 만나면 신분 밝히기를 꺼린다고 한다. 군에 대한 신뢰가 추락할 데로 추락해서다. 자업자득인 면이 있다. 부하 생명을 지킬 무기체계를 사적 이익과 바꿔먹은 ‘이적행위’를 한 장성이 있고 보호해야 할 부하 여군을 성폭행한 파렴치한 지휘관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다는 아니다.

지금도 추위 속에 근무하는 병사를 위해 라면을 끓여주는 대대장이 있고 아픈 부대원 대신 경계근무를 서는 소대장도 있다. 박봉에 낡은 관사에서 생활하면서도 조국을 위해 일한다는 보람을 품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존중받아야 한다. 군에 신뢰를 한번 보내보자. 그리고 그 신뢰에 부응하는지 지켜보자.

최현수 군사전문기자 hs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