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한민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입력 2015-12-02 17:55

요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는 말을 자주한다. 수능시험을 망쳤다며 초조하게 성적표를 기다린 큰아이에게, 대학 졸업반으로 취업 전선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시고 있는 조카에게도 해줬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 미국 메이저리그의 전설 요기 베라가 1973년 7월 뉴욕 메츠 감독으로 있을 때였다. 메츠가 내셔널리그 동부지구에서 시카고 컵스에 무려 9.5게임차로 뒤진 최하위에 머물러 있자 한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시즌이 끝난 것인가?” 베라는 이렇게 응수했고, 메츠는 결국 컵스를 제치며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이 말은 거짓말처럼 한국 야구에서도 통했다. 지난달 19일 ‘2015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 프리미어12’ 대회 준결승전에서 우리 대표팀은 0대 3으로 뒤지던 9회 대거 4점을 뽑아 ‘도쿄대첩’을 만들어냈다. 팬들은 물론 야구 전문가들과 기자들까지도 “이제는 끝났다”고 본 경기가 순식간에 뒤집어진 것이다. 우리 국민은 아주 큰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이면에는 ‘영원한 숙적’ 일본을 극적으로 꺾었다는 단순한 이유, 그 이상의 그 뭔가가 있었기 때문 아닐까?

현재 전 세계에는 이른바 ‘인생 결정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사회학과 스티븐 J 맥나미와 로버트 K 밀러 주니어 교수는 저서 ‘능력주의는 허구다’에서 “지금의 세상은 비능력적인 요인들이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것들은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것들이다”고 주장했다. 또 비능력적 요인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의 상속이라고 부연했다.

그럼 한국 상황은 어떤가. 온갖 수저 논란이 뜨겁다.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에다 심지어 다이아몬드수저까지 회자되고 있다. 집안 배경과 부모를 누구로 두고 있느냐에 따라 자신의 인생이 이미 결정됐다는 얘기다. 심지어 인터넷에는 부모의 연봉 수준과 수저의 종류를 연결시켜 놓은 표마저 돌고 있다. 가령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하려면 집안 자산이 20억원 이상이거나, 연수입이 2억원은 돼야 한단다. 이런 현실에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는 말은 공허한 메아리가 될 수밖에 없다.

‘수저계급론’은 우리가 사는 곳을 희망이 꺾인 절망의 땅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 그 위험성이 심각하다. 이는 얼마 전 통계청 조사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우리 사회에서 일생동안 노력을 한다면 본인세대에 개인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것으로 보는 이들은 21.8%에 불과했고 낮아질 것이라는 응답은 62.2%로 압도적이었다. 15.9%는 ‘모르겠다’고 했다. 계층이동 가능성이 ‘높다’는 비율은 2013년보다도 6.4% 포인트나 낮아졌다. ‘인생 결정주의’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달동네에서 태어난 지방대 출신이 거부(巨富)로 성공한 사례가 대서특필되는 건 더 이상 이 사회에서는 ‘개천에서 용 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러다가는 머지않아 아이들에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대신에 “너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끝나 있었다”고 말할까 봐 두렵다. 많은 국민이 야구 대표팀의 막판 역전극에 눈시울을 붉히며 환호성을 지른 것은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이게 불굴의 투혼으로 뒤집어졌기 때문이다. 대한민국도 이처럼 뒤집기가 가능해야 한다. 젊은 세대들이 “너는 무슨 수저를 물고 태어났느냐”고 서로를 비아냥대지 않고, 언제든 인생역전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한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기성세대, 특히 정치권과 경제계의 대오각성이 절실한 시점이다.

한민수 문화체육부장 mshan@kmib.co.kr